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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6-12-08 (목) 12:28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878    
더 큰 영광의 직분(고후 3:7-11)
아침에 밝은 해가 떠서 그 찬란한 빛을 비추면 밤에 비추던 달빛이나 사람이 만든 외등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햇빛이 그 어떤 빛보다 훨씬 밝기 때문입니다. 더 큰 영광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County 의 수장(Executive)에게 인정을 받아 그에게 어떤 상을 받는 것보다 미국 대통령에게 인정을 받아 영예로운 상을 받는 것이 훨씬 더 큰 영광인 것은 당연합니다. 이유는 일개 County 의 수장보다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훨씬 높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영광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새 언약이 모세의 옛 언약보다 더 큰 영광이 있음을, 영원한 영광임을 말씀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새 언약 아래 있는 우리 직분자들이 옛 언약의 구약 직분자들보다 훨씬 더 큰 영광, 영원한 영광의 사역, 그 섬김의 직분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6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의문(letter)’이라 함은 문자, 즉 모세 언약의 율법을 말하며, 옛 언약과 달리 새 언약은 교인들의 심령에 새겨지는 것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렘 31:33).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7절) 곧 율법은 사람의 죄를 지적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복음은 성령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했습니다. ‘의문’은 어느 정도 사람이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내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해버린,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 성령의 역사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능력은 성령께서 속사람을 변화시키는 데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율법의 옛 언약보다 성령의 새 언약이 더 낫고, 더 큰 영광인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하여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7-8절)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있었을 때에 모세는 거의 천사 수준에서 하나님과 영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두 돌비에 새긴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내려와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제사를 드리며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금송아지를 부수고 레위인을 중심으로 우상숭배한 그 백성들 3000여 명을 칼로 쳐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진 밖에 회막을 하나 짓고 거기서 하나님께 그 백성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고 다 진멸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 백성들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인이(모세)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가 강림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모세는 그 백성들의 문제는 율법 이상의 은혜가 있어야 해결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즉 인간은 죄성 때문에 잘못된 것을 안다고 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죄를 막을 수가 없고, 계속 우상숭배의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으니 율법 외에 죄륽 이길 수 있는 다른 힘을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바위 틈에 세워두고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하나님의 등(back)만 보게 했습니다(출 33:23). 왜냐하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등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서 감히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이후에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 수건을 써야만 했습니다(출 34:29-33).
   여기 하나님의 등(back)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사람으로 비유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몸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수준에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표현한 것입니다. 즉 모세가 본 것이 하나님 영광의 작은 일부를 본 것이지, 그 영광의 가장 밝은 얼굴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바로 더 큰 영광의 광채요, 그리스도요, 복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등이라면, 복음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어달라고 하는(시 4:6) 것은 하나님의 영광, 그 은혜가 임하여 복음의 말씀으로 죄를 사하시고, 영혼을 치료해 주시기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얼굴, 영광의 얼굴을 뵙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본문에서 바울이 비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의문(율법)과 영(복음)의 직분입니다. 여기 “직분(ministry)”(7, 8, 9절)은 사역을 말합니다. 섬김을 말합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율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서론에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7절). 율법의 역할은 죄를 지적하는 데에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었으면 사람이 죄가 죄인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롬 7:7; 갈 3:24).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 때문이지, 모세의 율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은 그 백성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기 위하여 지켜야 할 법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계속 있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애통해 하고, 회개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줄 알고 그 은혜 만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자비와 긍휼로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미리 보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역할은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지적함으로써 죄인 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0-22)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성령의 사역이기에 사람을 살리고, 속 사람이 변하게 합니다. 사람의 심령에 새겨지는 성령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깊이 깨닫게 되고,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 안에 더러운 죄성을, 욕망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심령을 가득 채우게 합니다. 그래서 9절에 의의 직분(사역)이라고 합니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정죄의 직분이라 함은 바로 7절에서 말한 모세의 율법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율법에는 눈으로 보이는 물리적인 권위가 필요했습니다. 심령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을 율법에 복종하게 하려면 하나님의 등이라도 보고 그 영광에 두려워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전하는 사람, 영의 직분자에게는 그런 권위가 필요 없습니다. 성령께서 각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더 큰 영광의 성령의 사역은 죄를 거부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의 눈이 두려워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눈이 두려워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이 두려워 죄가 싫어서 짓지 않고 의를 행하는 우리의 직분이 바로 더 큰 영광이요,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고 하였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였습니다. 옛 언약은 율법을 지켜 의로운 삶을 살라고 명령을 하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의의 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죄인이 의롭게 살아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되어서 의롭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울은 다시 한번 이 새 언약의 영광을 강조합니다.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10-11절)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라고 옛 언약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율법은 영광과 권위가 필요해서 영광스러웠지만,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 영광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도 아마 당시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율법주의자들이 있어서 율법을 강조하고, 복음을 무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유는 사탄은 계속해서 복음을 흐려 놓으려고 하거나, 복잡하게 하거나, 다른 것과 혼합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속삭입니다. 인간의 역할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엡 2:8-9). 인간은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가르치는 것은 우리에게는 구원받을 조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며, 단지 진실로 믿고 회개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처음에는 이런 놀라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좋아하다가, 점점 스스로 무엇인가 해야 구원 받는 것 같아서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마치 율법주의자들처럼 율법을 지켜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자랑을 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복음의 영광을 저버리고, 율법 아래 더 만족감을 갖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사실 더 큰 영광은 그게 아니고,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더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타성적으로 더 큰 영광의 사역인 복음의 사역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복음을 위해서는 희생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헌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시간을 내거나 물질을 투자하거나, 혹 다른 사람을 이 놀라운 영광의 섬김으로 섬기는 데는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제직 여러분!
   복음이 거저인 것은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너무 가치가 커서 다른 그 어떤 것으로는 얻기에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입니다. 헌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너무 싸구려라서 거저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그 무엇이 대신할 수 있습니까? 정말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치르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은혜를, 가치를 깨닫는 사람은 이 복음을 위하여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까지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 2000여 년의 역사에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오늘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저 북한이나 중동에서는 믿음 때문에 피흘려 죽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직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영의 직분자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전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본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영의 직분을 너무 가볍게, 하찮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모두는 이 더 큰 영광, 영원한 영광을 맛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귀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큰 영광의 사역에 동참하는 직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오늘날의 하나님의 나라, 주님의 몸된 교회의 제직들이 복음의 은혜와 능력으로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이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비록 나타나는 결과는 더디더라도 지속적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섬겨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영의 직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큰 영광의 사역을, 영광스러운 섬김을 감당하는 자들의 영광은 자신을 높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사랑과 섬김을 받고 사람들이 온전히 변화를 받아 그들도 이 영광의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적인 노력이나 사사로운 정, 인정(人情)으로 섬기려 하지 마십시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나라를 확장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남은 인생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더 큰 영광의 사역을, 섬김을 알아서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우리의 삶이 영광의 사역으로, 영광스러운 섬김으로 점철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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