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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3-08-06 (일) 05:5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383    
선한 것을 본받으라 (요삼 1:9-15)


아마 여러분들이 여태껏 들은 설교 내용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이 겸손 혹은 교만에 대한 내용일 것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의 교훈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겸손과 순종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중심인물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우리 예수님이 그 본을 보이신 분입니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겸손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며,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분입니다(빌 2:6-8; 히 5:8). 반대로 사탄 마귀는 교만과 불순종의 본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천상의 세계에서 떠났으며, 사람들에게 교만과 불순종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도 그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결과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롬 5:12). 그 이후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규정하는 한 단어가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며, 믿지 못하게 하며, 감사하지 못하게 하며, 결국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잠 16:5).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요한3서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는 진리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자였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낯선 순례자들에게 사랑으로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을 언급합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과 가이오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11절상)고 합니다. 사람은 악한 것은 잘 본받는 죄의 성향이 있기에 쉽게 그 악영향을 잘 받지만, 선한 것을 잘 본받기가 힘들어 그 영향을 잘 받지 않습니다.
우선 ‘디오드레베(Diotrephes)’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9절)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가이오가 속한 교회에 몇 자를 적어 편지를 보냈는데, 우리 성경에 없습니다. 아마도 분실한 것 같은데, 디오드레베가 없애 버린 듯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디오드레베가 가이오처럼 그 교회의 유력한 인물(장로?)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이오와 달리 사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접대하지 않았습니다. 가이오는 진리를 따라 행하기에 겸손히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대접하는데, 디오드레베는 진리에 행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사랑하며, 교회에서 스스로 으뜸되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도 요한과 그 동역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마귀의 조종을 받는 교만의 극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허락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주되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교회에서 으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섬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10절)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앞으로 그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사도의 권위로 그가 행한 일을 잊지 않고, 치리(Discipline)하겠다고 합니다. 징계하여 쫓아 내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첫째, 악한 말로 사도들을 망령되이 폄론하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그가 사도들을 부당하게 불공정한 악한 말로 비난하며, 거짓고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의 인격을 모독하는 비방의 말을 하면서,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상대방을 깎아 내리면 자신이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사도 요한이든, 가이오든 비방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것도 모자라 형제들을 접대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에 설명해드렸듯이 요한이 이야기하는 형제들은 당시 순례하며 복음을 증거하던 하나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당연하지요. 사도를 접대하지 않는 자가 그 형제들을 접대하겠습니까? 이 말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거역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신도 그들을 접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교인들도 접대하지 못하게 하며, 접대하면 교회에서 내어 쫓는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의 권력을 쥐고 교회를 흔드는 것입니다. 마귀 짓을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접대하는 가이오를 쫓아 내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 이 교회에서는 유력한 지도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기가 으뜸이 되어 교회를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의 근본적인 문제는 서론에 언급한 ‘교만’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11절)고 합니다. 즉,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디오드레베의 악한 말과 행실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대신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디오드레베와 같은 자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미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4)라고 하였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자라면 그럴 수가 없지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을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들에게, 그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악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머리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살아 계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체험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엄청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형제들을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살아계심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교회를 다녀도 그저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멸시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진리를 따라 사랑합니다.

사도 요한은 12절에 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디오드레베와 달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12절)고 합니다. 이 구절의 헬라어 원어에 의한 정확한 번역은, 보다 쉽게 의역하면, ‘데메드리오는 모든 이에게 선한 증거를 받고 있고, 진리 자체도 그가 선한 사람임을 증거하고 있으며, 우리도 그에 대한 증거는 참된(true) 것임을 알고 있다’ 입니다. 즉 데메드리오는 신앙인격이 주님을 닮은 겸손함이 있고, 말씀에 신실하고, 경건하여 그를 만난 사람들마다 정말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는 증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인에게 인정을 받는, 칭찬을 듣는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최초의 안수집사를 세울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교인들에게 칭찬을, 인정을 받았던 7사람들처럼 말입니다(행 6:3). 그래서 가이오는 이런 데메드리오의 선한 것을 본받아 계속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요한2서의 결론처럼 말합니다.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면대하여 말하리라”(12-14절)고 하면서, 평강을 바라는 문안인사로 편지를 마칩니다(15절). 가이오에게도 마찬가지로 직접 만나서 진리를 가르치기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귀를 기울이고 행할 것인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악한 말과 행동을 할 것인지, 주님을 본받아 겸손하게 섬길 것인지, 타락한 마귀의 영을 따라 교만하여 자기를 위하여, 으뜸이 되기 위하여 주장하려고 하든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디오드레베는 악한 것을 선택하여 교만하게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진리를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을 향해 망령되이 비방을 하고 거짓고소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으뜸이 되어 교회를 주장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순례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형제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교인들이 그들을 영접하려고 하면 교회에서 내쫓으려고 하였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었을 뿐, 하나님을 보지 못한, 만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의 종이 아니라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메드리오는 진리를 따라 행하여서 모든 교인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진리 자체가 그가 참된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겸손하였기에, 사도들은 물론이거니와 형제, 자매들을 사랑으로 대접하며 섬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00여년 교회 역사상 어제나 오늘이나 사탄 마귀는 교회 안에 분쟁을 일으켜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미국교회도,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헌데 이민교회 역사는 더 그런 모습이 많았습니다. 디오드레베처럼 마귀가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악한 말과 행동으로 공동체를 깨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데메드리오처럼 모두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성도들로 겸손히, 진리대로 행하려고 힘쓰는, 형제 자매들을 섬기는 분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정말 그리스도인 답다’ 라고 인정받기를, 주님을 본받아 가기를 바랍니다.
111년전, 1912년 4월 15일에 타이타닉호가 영국 South Hampton 을 떠나 뉴욕으로 향하던 중 빙산에 부딪혀 2,200명의 승선자 중 Edward Smith 선장을 비롯하여 1500여명이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체력이 좋고 발 빠른 남자들이 먼저 달려가 구명보트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였을텐데, 통계를 보니 어린이의 생존율이 51%, 여성의 생존율이 74%, 남성의 생존율이 20% 밖에 되지 안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나 생존자를 통해 알아보니 그 급박한 순간에 Edward Smith 선장이 남자들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Be British!” (대영제국인 다워라!)
오늘날 우리가 자신에게는 물론, 주위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Be Christian!” 이라고 소리쳐야 할 선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주위에 ‘교회다운 교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을 찾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요, 우리 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모인다는 좋은 소문이 퍼지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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