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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5-17 (일) 09:2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61    
믿음의 부부 (마 19:3-10)


김남준 목사님은 그의 책, ‘가족’에서 이렇게 말합니다.’가정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품어주는 따뜻하고 안전한 곳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가정은 가슴이 시린 곳이고, 가족은 아프지만 그리운 이름입니다. 물론 마음이 따뜻해지는 추억으로 가득한 가정, 존재만으로도 힘과 위로가 되는 가족을 가진 행복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정은 상처와 아픔, 그리움이 공존하는 곳이고 가족은 차라리 멀리하고 싶은 이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가족을 통해 먼저 사랑을 배우고 또한 인간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미움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자신의 가족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성숙해집니다. 철이 들어 가족의 소중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가정의 근본은 부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최초의 기관으로서 사회를 이루는 기초입니다. 가정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원리로, 성경적인 방법으로 세워지고 이루어야 원래의 목적에 부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집에 갇혀 있으니 어쩌면 부부가 더 가까워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서로의 결점이 잘 드러나 갈등으로 힘들 수도 있습니다. 쉽게 화를 내는 남편이나 아내라면 더욱 가정이 어렵습니다. 더 나아가 서로 존중하지 못하며 싸우고 학대한다면 아이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깨어진 가정의 한 어린이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우리 엄마 아빠가 함께 사는 게 소원이에요’라고 하는 것을 들었을 때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난 주일 어머니 날에 이어, 가정의 달 5월에 믿음이 있는 성경적인 부부관계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청교도들의 신앙이 사라진 미국 사회에서는 결혼한 가정 50% 이상이 이혼을 하고 있는 통계가 오래 되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황혼이혼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애들이 어릴 때에는 큰 상처가 될까 싶어 그냥 참고 살다가, 다 커서 출가해 버리고 나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보고 자라는 청년들이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묻습니다(10절).
그러나 결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의 죄에 있는 것이지요. 사람의 마음이 완악함에 있다고 예수님도 본문 8절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부부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래의 결혼, 부부관계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목적, 그 뜻을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서로 용서하며, 서로 복종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아름다운 가정을 꾸며 나가기를 원합니다.
믿음이 있는 부부관계의 두 가지 중요한 열쇠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성령님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남편과 아내가 겸손히 자신을 내려놓고, 서로 섬기며,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사랑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결혼과 이혼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다시 한번 곤경에 빠뜨리려고 시험하는 장면 속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문맥은 예수님의 공생애(public life) 사역 가운데 약 2년 가까이 갈릴리에서 제자들 하고만 생활하시면서 교훈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요단강을 건너 유대 지방에 가셔서 따르는 큰 무리 가운데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1-2절).
그 때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나아와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절하) 하고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혼문제에 있어서 한 쪽으로 치우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마 5:32)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예수님이 보수적인 것을 눈치챈 그들은 예수님이 이혼을 전혀 인정치 않든지, 아니면 쉽게 이혼하는 것을 반대한다든지 하여 유대인들 사이에 호응을 얻지 못하는 대답을 하실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보수적인 랍비 Shammai 학파와 자유주의적인 랍비 Hillel 학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사실 여자를 인간답게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던 시대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 Hillel 학파 사람들은 자기 아내가 공적인 장소에서 머리를 내리기만 해도, 다른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빵을 구울 때에 조금만 태워도, 음식에 소금을 많이 쳐서 조금 짜게만 해도, 시어머니에게 잘못 말해서 언짢게 해도 이혼할 충분한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식을 못 낳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구요. 그러니 하나님과 멀어진 지 오래된 그들은 이런 가르침을 즐겼습니다. 오늘날 쉽게 이혼하는 자유주의적인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지요. 물론 보수주의였던 Sammai 학파의 가르침을 따랐던 자들도 오늘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는 율법을 잘못 해석하여 결혼한 후에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남자 관계가 발견되면 그것이 즉각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조건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모세의 율법이 있기 훨씬 전, 하나님께서 원래 남자와 여자의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갑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4-5절, 창 2:18-24 인용)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결론으로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6절)고 하십니다. 여기 한 몸이 되었다는 원어의 의미는 풀로 붙이다, 혹은 시멘트로 발랐다는 것입니다. 뗄 수가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뜻이라는 말입니다.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서로 상대방에게 이제 한 몸이라며 맺은 언약(covenant)입니다. 계약(contract)이 아닙니다. 계약은 어느 한쪽에서 계약조건을 어기면 얼마든지 깨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은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피로써 맺는 언약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깨뜨리면 곧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에게는 생명 다하는 날까지 한 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에 바리새인들이 즉각 항변합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7절, 참고: 신 24:1-4). 그러나 율법에서 이혼을 허락한 경우는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 곧 처녀성을 잃어버린 것이 발견되었을 경우에 그것을 받을 수 없으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를 자기 집에 보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8절)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함을 알고 그런 경우에 헤어질 수 있는 예외를 두셨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신정국가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꾸 왕을 달라고 하자 할 수 없이 그 완악함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우도록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사울 왕 때문에 그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러면 9절에서 예수님께서 이혼할 수 있는 예외조항을 주신 음행(fornication)은 무엇입니까? 간음(adultery)과 다른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음행은 간음과는 구별되는 성적인 죄입니다. 간음은 자기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다른 남자나 여자와 성 관계를 맺는 것이라 한다면, 음행은 ‘자기 몸을 판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로 쉽게 말하면 창녀와 같이 자기 몸을 아무에게나 파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부부 사이의 성 관계가 아닌 간음을 비롯한 다른 모든 불법의 성적인 죄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내를 데려온 후에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었다고 버리는 것이 본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간음을 했다 하더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오늘 19장 바로 앞의 문맥이 무슨 말씀이셨는지 아십니까? 18장 21-35절까지 길게 비유의 말씀까지 사용하면서 네 형제를 용서하라는 교훈이었습니다. 다만 이미 앞서 언급한 대로 여자가 계속 음행을 저지른다면 이혼할 수 있다라는 말씀을(마 5:32)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결혼 자체에 의문을 갖고 예수님께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10절)라고 합니다. 여자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던 시대에 예수님께서 아내를 그렇게 높은 수준의 사랑을 하는 것으로 말씀하시자 자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불신 청년들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까? ‘나는 정말 행복한 부부를 본 적이 없어. 그러니 나도 결혼하지 않고 자유스럽게 살 것이야.’ 이런 말을 하는 청년들에게 비록 죄로 인하여 때때로 결혼생활이 힘들어도 우리 믿는 부부들이 축복의 결혼생활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극치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연모하라”(잠 5:18-19)고 하였고,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 18:22),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고 하였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아 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약 22년 전 그의 저서 “나이 드는 것의 미덕”에서, 그의 아내 로잘린과 결혼 후 52년을 함께 산 우리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다. 우리의 유대감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튼실해졌고 서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단 하루만 떨어져 있어도 마치 신혼 때 일주일이나 그 이상 바다에 나가 있었을 때처럼 왠지 외롭고 공허한 느낌이 든다. 나이 들면 젊었을 때보다 더 서로에게 헌신적이 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흥분과 모험과 성취가 가득한 매순간을 오롯이 맛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돕는 배필인 여자를 만들 계획이 있었습니다. 흙으로 아담을 창조하시는 것부터 시작하여 그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시는 것까지 모두 인간 창조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먼저 창조하시고 혼자 살아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스스로 무엇인가 모자라기에 자기를 돕는 자가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와를 허락하셨을 때 아담이 자신에게 하와가 진정으로 필요한 존재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존재로 소중히 여기게 하셨습니다. 서로를 향해 온전히 자신의 몸인 것처럼 아끼고 희생하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아담이 처음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는 사랑의 고백으로 말입니다. 히브리적인 표현으로 가장 최소, 최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후, 결혼하고 한 평생 신실한 부부로 끝까지, 죽는 날까지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탄 마귀는 끊임없이 갈라 놓으려고 합니다. 서로 힘들게 합니다. 경계하셔야 합니다. 성경적인 부부관계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너무 다른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는 의식 말입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나라는 의식을 늘 갖고 있어야 합니다. 서로 많이 다른 점을 이해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다른 점을 그대로 용납하셔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들게 바꾸려고 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진솔한 인격적인 대화(communication)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서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결혼하여 함께 살아갈수록 서로 친한 친구처럼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30대, 40대의 부부의 사랑과, 50대, 60대의 부부 사랑의 표현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랑의 표현도 변화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서로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서로에게 100% 헌신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내어주는 헌신입니다. 바로 언약이라는 개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제일 사랑하는 대상이 자식이 아니라 배우자이어야 합니다. 남편이나 아내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 하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고 가정 전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우리 자녀들이 가장 행복한 때가 아빠, 엄마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그 때 우리 자녀들이 안정감을 느끼게 되고, 보고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가능하면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는데, 영적인 필요는 배우자가 채워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각자 예수님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죽기까지 사랑하라고 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엡 5:25).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고 하였으니,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히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주께 하듯 복종하라고 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엡 5:22).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고 하지 않았습니까? 각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내주하는 성령님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각자에게 명하신 말씀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필요와 육체적인 필요를 서로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자를 이용하려고 하면 안되고, 섬기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축복하는 부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 가든교회의 부부들은 그런 부부로 말미암아 각 가정들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그 목적에 부합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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