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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5-24 (일) 10:2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344    
믿음의 부모와 자녀 (신 21:18-21; 골 3:20-21)


가정의 달을 맞이하며 지난 주일에는 믿음의 부부가 어떻게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끝까지 함께 하는 비결이었습니다. 오늘 은 주님 안에서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 있는 자녀의 도리, 그 책임과 함께, 믿음 있는 부모의 자녀 사랑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부모에게 상처받은 자녀들이 많습니다. 또한 부모라고 자녀들에게 상처를 받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내리 사랑’이라고 부모는 자녀들이 준 상처를 쉽게 용서하고 잊어버리지만, 자녀는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쉽게 지우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분은 평생을 잊지 못하고 사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면 달라야 합니다.

우선 믿음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부모들을 순종하라(신 21:18, 20; 골 3:20), 공경하라(엡 6:2; 출 20:12)는 것입니다. 순종(obedience)은 행동(action)이 뒤따르는 것을 말하며, 공경(respect, honor)은 그 순종의 근본이 되는 태도(attitude)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여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를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라고 했습니다(신 21:18). 그렇지 않고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는 늘 그들의 지혜나 충고에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잘 듣고 순종합니다.
물론 "주 안에서"(골 3:20; 엡 6:1)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나 도덕의 가르침과 다른 것입니다. 맹목적인 효(孝)가 아닙니다. 그 근본적인 사고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모이기에 감사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공경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님을 공경하며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골 3:20).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의 부모 앞에 어떤 수식어도 없습니다. 부모가 무식하고, 가난하고,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주 안에서 공경하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순종(u`pakou,w, obey)’의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아래서 듣는다' 라는 뜻으로, 주의 깊게 부모님의 말을 듣고, 들은 것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응답함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기억하십니까?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만 순종한 것이 아니라, 아들 이삭도 자신을 죽이려는 아버지에게 전혀 반항하지 않고, 죽음까지 각오하며 순종하였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물론 "주 안에서" 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죄를 짓게 하는 비윤리적이거나 부도덕한 일,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까지, 하나님을 거역하라는 것을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늘 하나님이 우선이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 오늘 본문에서 성결한 공동체 안에 완악하고(stubborn) 패역한(rebellious) 아들이 그 부모를 불순종할 경우에 어떻게 처리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물론 대게 자녀들의 잘못은 부모의 잘못에서 비롯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 자녀를 보면 부모를 알 수 있다고 하지요. 거꾸로 부모를 보면 자녀를 알 수 있다는 말도 되는 것 같습니다만, 앞의 말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부모가 최선을 다하여 가르치고 키웠음에도 정당한 이유가 없이 자녀가 패역하고 방탕하여, 아무리 타이르고 좋게 책망을 해도 듣지 않으면 포기하게 하셨습니다(19-21절). 공동체 전체를 위하여 그를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돌로 치라고 명하셨습니다. 물론 어느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하고 싶겠습니까? 정상적인 부모는 절대로 자식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자식이 스스로 끝까지 악을 행할 때에는, 부모에게 불순종할 때에는 자기 자식이기 전에 더 이상 하나님 백성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포기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면서 순종해야 합니까? 1) 자녀들이 그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일은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꾸로 부모가 자녀를 받들며, 자녀의 말을 듣고 따라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창조질서에 어긋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에게 권위를 부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를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2)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상처를 받았어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십계명에서도 인간관계에 대한 도리를 말씀하시는 계명들 가운데 첫째로 말씀하신 명령이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신 5:16)는 것이었습니다. 3) 자녀들이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 되기 때문입니다. 늘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하는 데도 복을 주십니다. 십계명 가운데 축복의 약속을 하신 첫 계명인 제 5계명입니다.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3)고 하셨습니다. 앞에 ‘잘 된다’는 말은 삶의 본질(quality)의 축복을 말하며, 뒤에 ‘장수하리라’는 것은 말 그대로 삶이 오래도록 지속됨(quantity)을 말합니다.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평안한 삶, 복된 삶을 오래 사는 복입니다. 즉 부모에게 잘 하는 자녀는 하나님께 잘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복 주시며, 그 축복의 삶을 오래 동안 지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믿으십니까? 사실 부모를 공경하며 순종하는 자녀들은 올바로 살게 되어 있고, 그렇지 않고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살면 불행할 뿐만 아니라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입니다. 만약 이 사회에 부모를 순종하고 잘 공경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면 별 문제가 없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회의 법도 잘 지키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면, 믿음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양육해야 합니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고 합니다. 여기 ‘격노하게 하다’ 혹은 ‘노엽게 하다’는 말 그대로 ‘화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자꾸 화를 나게 하여 부모에게 실망하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녀들의 분노가 바깥으로 분출이 되면 괜찮은데 그렇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이게 되면 그것이 삐뚤어진 성격으로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성질이 나쁘게 되는 것입니다. 우울증도 생길 수 있으며, 정신병이나 자살의 충동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자녀를 노엽게 말라고 했습니다. 제발 자기 자식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집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한 인격체로 대하십시오. 부모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뭐 잘못했다고 분노로만 대하면 자식들의 마음 속에도 분노가 가득하게 됩니다. 자식들은 자기 잘못은 잘 모릅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식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더 관대하여 늘 합리화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계속 마음에 분노를 가지고 자녀를 대하면 그 자녀는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의식을 가지고 대하게 되며, 나중에 결혼하여 자녀를 낳는다 하더라도 그 분노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면,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상태라면 삐뚤어진 성격으로 나중에 그 자녀들에게도 분노를, 상처를 물려주게 됩니다.
여러분의 자아를, 욕망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해서 무조건 자녀들의 비위를 맞추라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자녀의 성질을 건드려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어, 치유할 수 없는 분노를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불공평한 것, 부당한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일단 똑 같은 것을 나눠주면 아무 불만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에게 더 좋은 것을 준다든지, 많이 준다든지 하면 그것을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만약 큰 애라서 더 많이 준다면 잘 설명을 해서 설득을 시켜야 합니다.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자녀들과 비교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각각 고유하게 다 다른 은사들과 선물들을 주셨는데 자꾸 비교하여 평가하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특별히 다른 자녀들이 있는 앞에서 비교하면 그 자녀에게는 큰 상처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면 안됩니다. 큰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가능한 것 만을 요구하여야 합니다. 지나치게 부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자녀들을 무리하게 하면 화를 자초합니다. 다른 보통 아이들처럼 정상적으로 잘 자라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자녀들에게 '너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나았다' 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아니 말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행동을 그렇게 함으로, 즉 자신이 희생을 더 하지 않음으로 자녀가 그런 생각을 갖도록 하면 안됩니다. 말로 욕을 퍼붓거나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은 절대로 금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복입니다(시 127:3-5). 그러므로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지키도록, 부모님들을 공경하고 순종하도록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의 중심된 진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신 6:4) 입니다. 그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반응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 6:5-6)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 바로 뒤 7절에 나오는 말씀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즉 가정에서 늘 입으로, 행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되어 있어야 함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셨습니다. 잠언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부모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가르치는지 잘 나와있습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1:8),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3: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4:1), "내 아들아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4:10) 등 수없이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다 타락한 죄인들입니다. 아무리 귀엽고 사랑스러워도 그 안에 무서운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르쳐야 합니다. 의사소통을 해야 합니다. 언어의 장벽이 있습니까? 그래도 노력하셔야 합니다. 경계를, 절제를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라인은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계속 말해주어야 합니다. 어릴 때에 가르쳐야 합니다. 보통 초등학생 때까지 인격의 90% 이상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고등학생이 되기만 해도 힘들어집니다. 대학생이 되고, 청년이 되면 기도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절하)고 하셨습니다. 교양(paidei,a, training)이라 함은 자녀를 훈련시키되 체계있게 조직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잘못하면 벌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고 하였고,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 23:13-14) 고 하였습니다. 물론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때리면 안됩니다. 이성적으로 자녀를 가르치는 맥락에서 벌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감정으로 매를 맞고 자란 자녀는 감정으로 다른 사람을 때리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 주님처럼 잘하면 상을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상주는 것은 없고 잘못할 때 벌만 준다면 잘못 양육하는 것입니다.  또 훈계(nouqesi,a, instruction)라 함은 마음에 무엇을 집어 넣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올바른 것, 하나님의 교훈들을 심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잠언에 있는 많은 말씀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바른 태도,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부모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따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속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덕이 있는, 품격이 있는 자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올바른 사랑만이, 아가페 사랑만이 가능하게 합니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자주 부모의 말을 듣지는 않습니다. 반항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때에는 격려와 칭찬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의 눈높이에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다 그런 시간들을 지냈던 것을 기억하며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맡은 바 책임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만약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을 주장 한다면 가정을 비롯한 어느 공동체이든 문제와 갈등, 다툼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자녀관, 성경적인 부모관으로의 사고전환이 필요합니다.
자녀된 여러분! 어찌하든지 우리의 부모님들을 공경하고 순종합시다.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맙시다. 부모님의 필요를 채워주며, 기쁘게 해드립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부모를 사랑하며 섬기고 삽시다. 성경은 이것이 옳은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니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잘되고 오래 살도록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타락한 시대의 조류와 육체의 소욕을 거슬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녀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부모된 여러분! 자녀들을 잘 양육합시다. 올바로 사랑합시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해하려고 노력합시다. 그들의 마음에 계속 상처를 주어 분노를 심어 주지 말고, 오히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가르칩시다. 훈련이 인격을 만듭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먼저 본을 보이며 복음의 능력을 삶 가운데 나타냅시다. 그들이 여러분의 면류관이 되어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여러분을 공경하고 순종할 것입니다.
교회는 전도하고 선교하는 사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에 보내신 자녀들을 성경적으로 잘 키우는 것도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러한 믿음의 자녀와 믿음의 부모들이 이루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들로 가득한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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