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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6-21 (일) 06:1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58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입니까? (고전 4:14-17)


올해 아버지 날을 맞으면서 우리 교회의 아버지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드립니다. 축복합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정에서 존경 받고, 축복 받는 아버지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어머니의 역할도 그렇지만 우리 자녀들의 인생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니 너무 중요합니다. 평소에 잘 모르다가 아버지가 없어서 그리워하고 아쉬움이 있어야 그 소중함을 깨닫지요. 종종 한 아버지의 사랑과 리더십으로 그 자녀의 삶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아버지가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아버지가 다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좋은 스승, 좋은 Mentor 가 반드시 영적인 아버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영적인 아버지는 다 좋은 스승이며, 좋은 Mentor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 아버지들은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들입니까?

오늘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분열되어 힘을 잃어가고 있는 이유가 교인들의 교만한 마음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4:6). 비록 복음의 씨를 자신이 뿌렸지만 아마도 그 가운데는 많은 교인들이 진정한 구원을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구원을 받았어도 말씀으로 잘 자라지 못하여 세상적인 지식과 지혜로 교만한 마음이 가득하여 다 된 것인 양 대접 받기를 좋아했던 것을 꾸짖었습니다(4:7-8). 자신을 비롯한 사도들이 주님 때문에 당하는 핍박과 고난을 빗대어 세상에서 더러운 쓰레기나 만물의 찌꺼기로 대우를 받아도 묵묵히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다고 역설했습니다(4:9-13).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 자신이 그들의 스승이라기보다 영적인 아버지로 사역을 해왔고, 아버지로서 그들을 다시 만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19절). 여기 스승은 원어에 의하면 가정교사(tutor), 즉 선생, 혹은 Mentor 를 뜻합니다. 바울은 앞서서 자신은 복음의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농부(3:6), 하나님의 동역자로(3:9), 또는 건축가로(3:10), 그리스도의 일꾼으로(4:1),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4:1) 표현했다가, 이제는 영적인 아비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복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을 낳았기 때문이었습니다(15절하). 그저 스승으로서 단지 지식만 가르치거나 앞길을 지도하는 자로 끝나는 사람들은 많지만 영적 아버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물론 간혹 사도 바울처럼 아버지와 같은 스승도 있습니다만, 단지 스승, Mentor 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로,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스승도 제자를 사랑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만, 스승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14절)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교만한 마음, 왕 노릇하면서 대접 받으려는 것을 꾸짖었는데, 창피를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사랑하기 때문에 권면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기 위하여, 상처주기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엡 6:4). 여기 14절에 “사랑하는 자녀 같이”의 사랑은 원어에 의하면 아가페 사랑을 뜻합니다. 형제 우애의 사랑, 필레오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깊고, 강한 사랑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마치 친 자녀를 사랑하되 하나님 사랑을 더해서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오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오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고후 12:14-15)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랑의 아버지는 자녀에게 영적 기업을, 유산을 거저 줍니다. 탕자의 비유를 기억하십니까(눅 15:11-32). 정말 자격이 없는 자녀에게, 아니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녀에게 거저 줍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에 영적 재산을 물려줍니다. 육적인 것은 물론 영적인 것을, 믿음을 물려줍니다. 그리고 축복합니다.
또한 이런 아버지는 자녀들의 잘못을, 실수를, 실패를 덮어줍니다.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치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도다”(히 4:14)라고 한, 예수님처럼 자신이 겪은 바대로 그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상처를 받고 있는지 이해하기를 애쓰고, 치유함을 받도록 도와주려고 합니다. 온유와 관대함으로 권면합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님으로부터 온유함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고후 10:1) 하였습니다.

둘째로,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는 자녀의 본이 됩니다. 스승은 본을 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가르치고 지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로만 해서는 자녀가 잘 배우고 따라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6절)고 하였습니다. 본을 보이지 못하는 아버지라면 결코 자녀들에게 존경 받지를 못하기 때문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는 반드시 자녀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말하는 대로 순종하라고 할 뿐 아니라, 아버지가 하는 대로 따라 하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림도, 찬송과 기도를 함에도,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함에도, 예물을 드리는 삶에도, 사랑하며 섬기는 삶에도, 아니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삶으로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자신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자신에게서 잘 보고 배운 영의 아들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낸다고 합니다(17절). 그래서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7절하)고 하였습니다. 즉 디모데를 보면 바울이 어떠한가를 더욱 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쳤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의 사명에는 분명히 가르침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말씀을 모르면 가르칠 수가 없겠지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대로 가르치는 대로 아버지가 그렇게 살아야 진정한 가르침이 되겠지요. 복잡하게 가르칠 필요는 없습니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십시오. 너무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이해를 잘하고 받아들여서 기뻐하고 즐거워했다고 하였습니다(막 12:37). 십자가의 복음이 얼마나 단순 명료합니까?
물론 가르침에는 때로 잘하면 상을 주고, 잘못하면 징계의 매를 듭니다. 스승은 그렇게 못합니다.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 중에서 자신이 다시는 고린도를 방문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교만해진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속히 그들에게 나아가서 그 교만한 자들이 무슨 말을 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합니다(19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20절) 한 것처럼, 말이 아니라 능력 있는 삶, 죄의 유혹을 이기는 능력이야말로 참된 성도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능력이, 성도의 능력이 세상 것을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 재주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저 말만 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만약 말만 떠들고 삶에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정말 교만한 것이니 그런 교인들을 가서 책망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진리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고, 죄를 거부하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능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말로만 떠드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훈계하고 책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정히 안되면 징계의 매를 들어야 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사랑과 온유함으로 말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21절)!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는 그 자녀들의 삶에 의의 열매가 없고, 교만한 말만 있다면 책망해야 합니다. 때로는 징계의 매를 들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마음 아프지만 무섭게 훈련시켜야 합니다. 자식이 잘 되라고 매를 드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 때 잘 되려는 자식은 아버지의 책망과 훈계를 듣고 스스로 고치려고 합니다. 사실 자녀들이 사춘기만 되어도 가르치기 힘듭니다. 기독교 교육학에서도 사실 90% 이상은 다 사춘기 전에 부모에게서 자녀들이 배운다고 합니다. 대학생이 되었다면 정말 기도 밖에는 할 수 없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가르칠 수 있을 때에 부지런히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자녀들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대하십니까? 본을 보이고 있습니까? 가정에서 영적 지도자로서 자녀들을 가르치며, 말씀으로 훈계하며 때로 징계하십니까?
오늘 말씀은 영적인 아버지들에게, 그리고 영적인 자녀들에게 동시에 주시는 교훈이 큽니다. 여러분들이 영적 아버지라면 육적 자녀일 뿐 아니라 영적 자녀들에게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영적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을 이해하면서 온유와 관대함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그냥 스승이 아닙니다. 의붓 아버지도 아닙니다. 내가 낳은 자녀이기에 그만큼 소중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자녀 앞에서 본을 보이고 살려고 애를 씁니다. 담대히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완전한 삶은 아니지만, 아직 부족한 면은 있지만 그래도 자녀에게 나의 신앙생활을 본받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가르쳐야 합니다. 몸소 실천함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때로는 훈계하며 책망해야 합니다. 잘못을, 실수를 덮어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 징계의 매를 들 수도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정말 사랑하는 내 자녀라면 자녀가 잘 되라고 징계합니다. 물론 조심해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징계함으로 자녀에게 상처를 주면 곤란합니다. 노엽게 하면 안됩니다. 사랑과 온유로 해야 합니다.
어머니들은 아버지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영적 지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하도록 말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육신의 아버지가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라면 정말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잘 배워야 합니다. 영적 자녀로서 여러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온유와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친밀한 교제를 해야 합니다. 고아가 아닙니다. 교제는 없이 선물에만 관심이 있으면 곤란합니다. 아버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잘 배워야 합니다. 훈계와 책망까지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징계의 매라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변해야 합니다.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도 나중에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영적인 신앙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물론 엄연히 아버지가 있는데 고아의 영으로 교제를 깨뜨리면 안됩니다. 거저 주시는 선물에만 관심을 가지면 안됩니다. 물론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와 좋은 관계 속에 늘 교제를 해야 합니다. 계속 은혜를,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거룩한 삶, 경건한 삶,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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