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018,097
오늘방문 : 1117
어제방문 : 2757
전체글등록 : 3,841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5-01-18 (화) 06:4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568    
[1/16/05] 사랑의 모임
사랑의 모임 (요 13:34-35)
초대교회 신학자요, 지도자였던 터툴리안 교부의 글에 보면 초대교회 교인들은 불신자들을 전도할 때에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불신자들을 향하여 그렇게 전도를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있는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심판을 받기 위하여 12제자들과 작별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어느 다락방에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활강령이 ‘서로를 향한 사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구역 교회(모임)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일동안 저는 전체 교회로서 실천하기가 어려운 생활 강령이 구역 교회(모임)에서는 쉽게 실천될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바로 그 첫째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 구역 교회(모임)은 사랑의 모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수없이 들어왔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또 이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까? 그만큼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하였습니다. 여기서 새 계명이라는 말씀은 처음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레 19:18) 하신 계명과 비교해 볼 때에 새 계명의 사랑에는 차이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사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하라 하신 이 계명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나 ‘나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이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계명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구약의 계명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표준이 됩니다. ‘ 내 몸처럼’ 이라는 말씀에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의 척도가 됩니다. 그러나 새 계명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표준이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요, 기대입니다. 사랑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12명의 제자들은 이 사랑을 실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 이전에 요한복음 13장에서 앞에 나오는 두 가지 사랑의 예를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실제로 먼저 사랑을 실천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그 분이 가르쳐준 사랑은 힘들고, 아파하고, 더럽혀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요 13:3-17).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가장 더러운 곳이 발이었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4-15절)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장면은 자신을 팔아버릴 가롯 유다의 배신을 아시고도 끝까지 그를 품에 안아 주신 일입니다(요 13:21-26). 그가 주님을 버려도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유다 스스로 자기를 버렸을 따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천제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해 보면, 그냥 볼 때는 어렴풋한 별도 렌즈를 통해보면 눈 앞에 있는 듯 형체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볼 때 비로소 선명하게 보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죄인을 용서하고 품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신 동기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매일 묵상하여야 합니다. 십자가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곳은 없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오늘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기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미 12제자들이 자신을 다 배신할 줄 아셨던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그 사랑을 삶을 통하여 드러내며 살아가기 원한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경험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가지고 의지적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말씀에 순종하리라 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감정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대상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그처럼 서로 사랑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35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였습니다. 한 공동체를 이룬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앞서 터툴리안 교부의 말과 같이 말입니다. 또한 유명한 신학자였던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제자의 배지’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여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도 역시 우리의 배지가 아닙니다. 성경을 통달하여, 성경 지식이 많아도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대변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지식도 우리의 배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조건적이고, 이기적이기에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 존재하는 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작은 공동체인 구역 교회(모임)에서 참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전도(선교)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이웃들에, 우리 사회에 아직도 전도(선교)의 문이 닫혀 있다면 우리가 사랑의 실천을 외면해서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들이 1세기-3세기에 걸쳐 세상을 바꾼 강력한 이유 중 하나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역동적인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하는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이 날마다 집에 모여 떡을 떼고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행 2:46). 가정 교회, 구역 교회 안에 있었던 진정한 사랑의 교제, 이것이 불신자들을 믿음의 교제 안에 끌어들인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흔히 우리는 사랑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삶을 통하여, 생활 속에 나타나는 덕목입니다. 물론 사랑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마음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사랑을 이야기 할 때에 무인도에서 홀로 수양하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듯, 사랑은 마음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마음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내 보여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진정으로 사랑이기 위하여서는 밖으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적지 않은 신자들이 이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만 사랑하겠노라. 내 마음에 가득 하나님 사랑을 채우리라’는 미명 아래 자신 속으로만 침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삶을 통하여 확증됩니다. 삶을 보면 그 사람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는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만 한정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주님께서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신 교회를, 성도를, 이웃을, 구역 가족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모임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가진 평범한 생각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산을 옮길만한 놀라운 믿음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고, 심지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 주기까지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사랑 자체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유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데에는 희생이 들지 않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막대한 희생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달짝지근한 연애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살을 에고 뼈를 깎는 것 같은 희생임을 압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라고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인 방언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그저 소리만 크게 나는 꽹과리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사인데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받은 예언하는 능이 있고,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과 놀라운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사랑과 믿음은 따로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 분을 믿게 되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분의 사랑에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감화, 감동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신 것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셨다면, 아니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의지적으로 결단을 내리시면 성령님께서 도우셔서 사랑을 실천할 수있습니다.
비록 100여명이 되는 교인 전체를 사랑하지 못해도, 적어도 구역 가족들, 여러분의 식구들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하여 각 구역이 참된 사랑의 모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참된 사랑의 모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327 주일설교 [8/9/06] 치유하시는 예수님 한 태일 목사 2006-08-12 2717
1326 주일설교 [12/11/05] 큰 복을 받은 사람 한 태일 목사 2006-08-12 2715
1325 주일설교 [10/10/04] 목숨 거는 개혁 한 태일 목사 2004-10-13 2704
1324 주일설교 [8/15/04] 사망을 이기게 하심 한 태일 목사 2004-08-17 2701
1323 주일설교 [10/7/07]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 태일 목사 2007-10-08 2693
1322 주일설교 [5/8/05] 어머니의 믿음 한 태일 목사 2005-05-11 2692
1321 주일설교 [1/21/08]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한 태일 목사 2008-01-22 2687
1320 주일설교 [7/23/06] 진실로 믿으면 한 태일 목사 2006-08-12 2681
1319 주일설교 [7/22/07] 헛된 일을 버리고 한 태일 목사 2007-07-26 2680
1318 주일설교 [7/10/05]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성도 한 태일 목사 2006-08-12 2678
1317 주일설교 [10/30/05] 받은 은혜를 기억하라 2 한 태일 목사 2006-08-12 2668
1316 주일설교 [6/5/05]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한 태일 목사 2006-08-12 2667
1315 주일설교 [3/4/07] 복음은 . . . 한 태일 목사 2007-03-07 2660
1314 주일설교 [5/15/05] 유쾌하게 되는 날 한 태일 목사 2005-05-17 2653
1313 주일설교 [5/21/06] 복되고 형통한 가정 한 태일 목사 2006-08-12 2652
1312 주일설교 [2/20/05]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한 태일 목사 2005-02-22 2651
1234567891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