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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7-05-21 (월) 10:0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815    
[5/20/07] 우리가 믿는 것 9
우리가 믿는 것 9 (요한복음 11:25-27)
- 사도행전 강해 8 -

그 동안 약 두 달 넘게 살펴보았던 사도행전 강해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 번에는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심을 믿는 것, 우리가 지은 죄들을 회개함으로 용서 받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신앙고백 가운데 우리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문맥은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다니에 그 유명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사는 집을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장면입니다. 이유는 그들의 오라비인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죽을 병이 들었던 오빠를 살리기 위해서 일주일 전에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었지만(요 11:3), 예수님께서는 그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4). 하지만 이틀 후에 그만 나사로는 죽고 말았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상심한 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 자매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베다니로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지 나흘 만에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이미 시체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예기를 들은 마르다는 주님을 반갑게 맞이하지만 일찍 오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예수님께 하소연을 합니다(요 11:21). 또한 작은 믿음을 가지고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주실 줄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오라비를 당장 살릴 것은 생각 못한 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39절에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을 옮기라고 했을 때에 이미 나흘이 되어 냄새가 지독하다고 하면서 너무 늦어서 예수님도 어떻게 못하실 것이라는 투로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실 때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 것으로 이해했습니다(11:23-24).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사두개인과는 달리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부활할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행 23:8).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고 25절에 말씀하시면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다니' 란 헬라어 원어에 의하면 "괴로움의 집" 이란 뜻입니다. 주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있는 베다니에 오심은 병과 죽음으로 눈물 골짜기를 이루는 곳을 찾아 오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다니의 실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이 괴로운 세상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베다니와도 같은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진리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 나셨지만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 가운데도 있음을 믿으십니까?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는 물음에 '참으로 믿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고백에도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
이 말은 먼저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상반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인류의 죽음은 자연현상이나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대가로 온 것입니다(롬 6:23). 창세기 3장 19절에 주어진 하나님의 선고 곧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 것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었습니다. 그 후 아담의 자손들은 출생과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거절하거나, 피하거나, 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라면 누구나 한번 죽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믿으면서도 죽음에 대한 준비 없이 살아갑니다. 마치 늘 지금과 같을 줄 오해하는 듯한 삶을 살아갑니다.
또,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함은 죽은 다음의 부활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로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라"(사 26:19)라고 했습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죽은 다음의 부활을 두 가지 종류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고 하였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행 24:15)고 했습니다. 즉 신자의 부활을 가리켜 생명의 부활이라고 하며, 불신자의 부활을 가리켜 심판의 부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함은 전인적(全人的)인 부활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육신이 없이 영혼만 부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말할 때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없는 몸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 반대로 몸이 없는 영혼도 온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부활할 때에는 전인으로, 영혼과 육신이 함께한 온전한 인간으로 부활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에 많은 사람이 그를 알아 본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한다고 할 때에 그 관계에서 살펴볼 수 있는 두 가지 내용을 사도 바울은 말씀하였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의 외아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법적으로 친 아들은 아니지만 아들(양자)로 삼는 것입니다. 양자의 영을 부어주셨다고 하였습니다(롬 8:15). 둘째는, 양자들도 친 아들과 마찬가지로 유업을 상속으로 받습니다. 로마서 8장 16-17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부활과 영생이 그 상속으로 받는 유업, 후사(inheritance)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받은 유업, 그 부활의 영광이 언젠가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고전 15:20-23).

둘째,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반드시 부활 후에 영생이 온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영원히 사는 진리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eternal life)과 영벌(eternal punishment)입니다. 영생의 세계는 믿는 자가 받는 생명의 부활 세계입니다. 영벌의 세계는 불신자가 받는 심판의 부활 세계입니다. 예수님은 멸망의 문이 있고 생명의 문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멸망의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의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하였습니다(마 7:13-14). 또 주님은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충성된 종과 게으른 종,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악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마 25:10-11, 21, 30, 46).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도 신자와 불신자의 금세와 내세의 삶을 나타낸 주님 자신의 진리의 표현이었습니다(눅 16:19-31). 예수님께서는 또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49-50)고 했습니다. 그리고 "떠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고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망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의 세계가 있습니다. '영생'을 마치 지금 우리가 사는 것처럼 죽지않고 그냥 계속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습니다. 헬라 원어에 생명(life)을 가리키는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bivo"로 '생물학적 생명'을 가리키고, 또 다른 하나는 zwhv로 '풍성한 삶의 생명'을 가리키는데, 주님께서 영생을 말씀하실 때는 항상 zwhv를 사용하셨습니다. 즉 죽음이 어쩌지를 못하는 이 영생은 지금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살아가는 목숨이 계속 부지된다는 뜻이 아니라, 완전히 변하여 이 세상 시간이 어쩌지를 못하는, 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삶입니다. '영원' 하다고 할 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안에서의 영원이 아니라, 이 시간 밖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원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가 영원히 살 처소를 준비하러 간다고 하신 바로 그 처소, 천국에서의 삶입니다. 그것은 새 세상이라고 했습니다(마 19:28). 만물을 회복하실 때 라고 썼습니다(행 3:31). 하늘과 바다가 끝장이 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출현되는 세계라고 했습니다(계 21:1). 바로 그곳은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했습니다(요 14:2). 거기서 신자들은 새 몸, 영생의 몸으로 살게 됩니다. 썩지 아니하는 몸(고전 15:45), 영광스러운 몸(고전 15:43), 강한 몸(고전 15:43),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살게 됩니다. 거기엔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픈 것이 없습니다. 거기엔 밤이 없는 세계입니다. 물론 우리는 영생의 실존을 다 알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세 영광의 세계를 이 세상의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표현한다고 해도 우리가 다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보석의 아름다움을 이해시킬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믿음의 눈으로 감지하고 사모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미 영생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영생은 주님 재림하시면 천국에서 누리게 되지만, 이미 우리는 영생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부자관계 자체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는 죽음이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참으로 믿습니까? 무덤을 깨치고 다시 사신 주님을 믿습니까?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을 믿습니까? 그 부활의 능력이 오늘도 우리에게 역사하심을 믿습니까? 죽음이 우리를 어쩌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될 것을 믿습니까? 그 소망이 확실합니까? 그러면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지요. 그래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명한 초대교회 순교자 폴리캅은 화형을 당하면서도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올라간 것처럼 나도 이 불꽃 속에서 주님을 대하게 되니 참 감사합니다 "하고 개가를 불렀던 것입니다. 무디는 "땅은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도다! ", 박관준 장로는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 김활란 여사는 "내가 죽거든 슬피 울지 말고 승리의 개가를 힘써 불러 달라 "고 죽음 앞에서 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종교개혁가 칼빈도 바울의 고백인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를 거듭 외우면서 평화롭게 숨져갔던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 이후의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했던 철학자 니체와 같이 이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임종 시에 죽음을 두려워하며 발버둥을 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골은 그의 명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소망이 없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위를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베다니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주님이 오늘도 찾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나사로를 찾기를 원하시는데 여러분 스스로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안에 있는 그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 온유와 그 영혼들을 존중함으로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벧전 3:15)?
아니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부활의 주님을 못 만나셨습니까? 그 주님께서 오늘도 지극한 사랑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님께 확실한 대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영생을 누리기 원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합니다. 믿고 받으시면 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사도신경 강해를 처음 시작할 때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람이 무엇을 믿고 사느냐가 그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좌우합니다. 그 사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사실 사람은 다 무엇인가를 믿고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믿느냐는 너무 중요합니다. 비진리, 생명력이 없는 거짓을 믿고 살겠습니까?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를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들에게는 위대한 삶의 철학이 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신앙고백입니다. 칼빈은 이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그 유명한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거룩한 교회를 이 세상의 구심점으로 삼고 살아가는 고백입니다. 어떠한 절망에서라도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마음에서 오는 사죄의 확신을 고백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낙천적인 소망의 종말을 믿습니다. 다시 사는 영생의 소망을 고백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사도신경 맨 마지막에 "아멘"으로 끝을 맺고 있지요. '내 마음에 그렇게 확실히 믿습니다' 라는 뜻의 아멘입니다. 즉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고백이자, 하나의 기도이기도 하다는 말씀입니다. 늘 사도신경을 믿고 고백함으로 우리의 신앙이 더욱 확신에 차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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