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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7-07-26 (목) 23:4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679    
[7/22/07] 헛된 일을 버리고
헛된 일을 버리고 (사도행전 14:11-18)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매스컴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오늘날까지 이 사회에 더욱 두드러진 것은 자기를 PR 하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어 추앙을 받고 싶은 인간의 욕구들이 분출되어 어떤 공동체에서든지,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든지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입니다. 속되게 이야기하면 자기를 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업계는 물론 연예계, 스포츠계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아니 그렇게 해야 출세한다고 조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인간 내면에 있는 죄성, 이기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기 원하는 욕구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면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시각에서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은 누군가를 그렇게 높이고 숭배하기 원하는 종교성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신을 만들어 그렇게 섬기는가 하면, 한 사람을 영웅화하기를 즐겨 하며, 거의 광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도 탄생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그런 두 가지 일이 다 헛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 1차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사역하던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장애인에게서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보고 그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으키자, 그 기적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그들이 섬기는 신들(gods)인 쓰스(Zeus)와 허메(Hermes)로 생각하여 그 신들이 다시 강림한 것으로 여기고, 그들 앞에 제물을 가져와 제사를 드리며 숭배하려고 하였습니다(11-13절). 로마에서는 이 쓰스 즉 제우스 신을 Jupiter 라고 불렀고, 허메 즉 허르메스 신은 Mercury 라고 불렀던 유명한 신들(gods)이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사도가 고쳐준 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못 고치는 불가능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앉은뱅이가 자기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본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신들께서 우리 가운데 현현하신 것이다’라고 여기며, 바울과 바나바에게 당장 제물, 소를 바치고, 화관(wreaths)을 가지고 경배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쓰스, 제우스 신은 헬라인들이 섬기는 많은 신들의 우두머리였으며, 허메는 그 제우스 신의 수석 대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말을 논리있게 잘 하였기에 둘 중 바울을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였다고 합니다(12절). 아마 바나바는 바울보다 몸집이 크고 튼튼하여서 쓰스라 칭하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쓰스 역시 구브로 섬 출신으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한 것에는 그들 사이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한번은 Zeus 와 Hermes 가 루스드라로 내려와서 변장을 하고 숙소를 구하였는데, 천 여 가구를 두드렸지만 아무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침내, 루스드라 도성에서 좀 떨어진 짚과 갈대로 지어진 초라한 오두막에서 사는 한 노부부 빌레몬과 바시우스가 흔쾌히 그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정성을 다하여 그 손님들을 대접하였더니 그에 대한 감사로 그 신들은 그 오두막을 금 지붕과 대리석 기둥들의 신전으로 변형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빌레몬과 바시우스를 그 신전의 사제와 여사제로 임명했으며, 그들은 죽어서 참나무와 보리수나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신들을 냉대했던 루스드라 사람들에 대하여 모든 집들을 부수고 멸망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화 때문에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신들을 잘못 대접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나타나서 단 한번의 명령으로 평생을 앉아서 지내던 앉은뱅이를 고쳐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고는 그 옛날의 쓰스와 허메가 다시 강림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물과 화관을 바치며 숭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14-15절)고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두 가지 유혹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상 혹은 사람 숭배의 유혹입니다. 서론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루스드라 사람들의 행동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우상 혹은 사람 숭배의 욕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본연 깊은 곳에 심어놓은 종교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하나님 만이 예배의 대상인데, 사람이 만들어 놓은 신들이나 사람 자체가 예배의 대상이 되어서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호세아서를 강해하면서 몇 번씩이나 강조하였습니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우리가 더 사랑하게 되는 것, 혹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다 우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우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 생각 속에 우상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저 돈, 재물 생각만 한다면, 그저 자식 생각만 한다면, 그저 직장만 생각한다면, 그저 이성만 생각한다면, 그저 취미생활만 생각한다면 그 모든 것이 다 우상인 것입니다. 또는 지나치게 어떤 사람들을, 유명 인사들을 따르며 밤이나 낮이나 그 사람들만 생각한다면 그들도 우상인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우상입니다. 이렇게 우상을 만드는 것이 헛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세에게 준 십계명에도 제 1계명과 제 2계명이 이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그런 큰 죄악을 짓고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결국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우상이 없기를 바랍니다. 만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보다 높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를 막는 그 어떤 것도 없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자기를 높이고 싶은 유혹입니다. 자기를 우상화하는 것이지요. 남들이 자기를 높여 주며 추앙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이 제물과 화관을 가져와 그 옛날 자신의 조상들이 쓰스 신과 허메 신이 임하였을 때에 못다한 대접을 하기 위하여 그 앞에 나와 경배하려 하였습니다. 아마 바나바와 바울도 처음에는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가 곧 이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이 아주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때에 바나바와 바울이 그냥 한번만 눈감고 넘어가면, 그들은 사람들에게 신적인 존재, 영웅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을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이다’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순간은 사람으로서 맞이할 수 있는 최대의 유혹의 순간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유혹의 순간에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외칩니다. 즉 ‘우리들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약점과 허물이 많은 사람과 일반입니다 이러지 마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헤롯이 그 백성들이 그를 신처럼 높일 때에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자, 주의 사자가 즉각 심판하여 충(벌레)이 먹어 죽은 사건을 기억하였을지도 모릅니다(행 12:21-24). 그러므로 결국 그 무리를 말려 제사를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18절).
사랑하는 여러분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그들과 똑같이 그렇게 ‘우리도 당신들과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하지를 못하여 이단 교주들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말입니다. 하지만 아마 여러분 대부분은 자신있게 ‘그럼요, 어떻게 내가 신이라는 말입니까?’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을 그렇게 신처럼 떠 받들지는 않아도 여러분 자신을 높여주는, 영웅시 하는 사람들을 말릴 수 있습니까? 아니면 당시 기분이 좋아져 우쭐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려고 하지는 않겠습니까?
아니 반대로 다른 사람이 나를 잘 몰라주면 섭섭하고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는데, 끼여들어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 결과 자주 주위 사람들과 논쟁을 하거나, 싸우지는 않습니까? 아니 잘 몰라주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나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면 은근히 화가 나고 욕이 나오지는 않습니까?
이런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입니다. 나를 높이고, 남들에게 추앙을 받는 것이 다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영광을, 높임을 받고, 추앙을 받을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지요. 할렐루야!

두 사도는 자신들을 신으로 섬기려는 그들을 말리면서 그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칩니다(15절하). 자연계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자연 계시라 함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 자연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말입니다. 본문 16-17절에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런 엄청난 우상을 숭배하는 죄에 대하여 속히 처벌할 수도 있으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동안 오래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들 마음대로 하도록 묵인하였지만, 사실은 이 모든 만물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은총을 내려주셨고, 지금도 내려주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 죄인과 의인,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지 않고 때를 따라 비를 내리셔서 곡식과 채소, 과일이 자라게 하시며, 맑은 공기와 물을 허락하시는 신비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믿기 전부터도 이렇게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신비한 생명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을 허락하시고, 먹을 것을 허락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대자연 속에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향한 사랑과 은혜를 계속 나타내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듭나지 않으면 그렇게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들의 눈에는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손길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범할 수 있는 죄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혹은 누구를 우상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헛된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예배를,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돈만을 추구하고 살면서 부자가 되면 여러분이 행복해진다고 생각하여 돈이 우상이 된다면, 세상의 재벌들이 다 행복해야 할텐데 결코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만일 권력이 여러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여 권력이 우상이 된다면, 세상 나라 대통령이 행복해야 할텐데 정말 그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만약 많이 배워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공부가, 학위가 우상이 된다면 대학 교수들이나 박사들이 반드시 행복해야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또는 유명해지거나 인기가 있어야 행복해진다고 생각하여 그것이 우상이 된다면 인기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압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추구하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며, 영화롭게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때에 인간 내면의 공허가 채워지고 참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높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좀 알아주기 바라고, 나를 좀 높여주기 바라기에, 나를 자꾸 나타내려고, 자랑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이생의 자랑을 버리라는 것입니다(요일 2:16). 그저 주님만 높이라는 말입니다. 내 이름보다는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너무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 중심으로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 놀라운 대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 66권을 주셔서 더욱 자세히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신 특별한 사랑, 특별한 은혜에 더욱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더 잘 배우며 알아갈수록, 더 가까이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사랑의 밀어를 나누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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