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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11-11 (월) 10:3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53    
비판하는 대신에 (눅 6:37-38)

개인이나 한 모임이 그 도덕적 혹은 종교적 기준을 정하게 되면 그 기준에 의하여 사람들을 비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러했습니다.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그들은 점점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생각과 능력에 맞도록 수정하였습니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서 성경의 권위를 넘어서는 유대주의를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서서 유대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교만하게 비판하고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용서할 줄도 모르고, 은혜도 없는, 마음이 굳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도 겉으로 드러난 외모나 피상적인 것에 근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를 세우려면 남을 비판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높이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에 관심을 갖고 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꾸짖었습니다(예-눅 18:11-14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물론 우리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을 전혀 비평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주의자들을 비롯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란 명목으로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성경의 진리나 교리를 무시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른 교리, 성경 말씀에 일치하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만이 진정한 거룩과 하나됨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진리를 왜곡하며 죄를 용납하는 맹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구약을 읽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며 비판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 하였습니까? 그리고,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진리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개혁 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개혁은 영적, 도덕적으로 사람들이 밑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을 거부할 것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죄의 권세는 늘 하나님의 의, 그 진리와 대적합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부정적인 명령 둘과 긍정적인 명령 둘이 나타납니다. 산상수훈 전체 내용은 참 진리와 거짓의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자 함입니다. 영적 진리와 영적 위선의 차이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참과 거짓을, 실제 모습과 가식을, 참된 의와 거짓된 의를 구별하기 원하십니다. 즉 우리는 누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하고 있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7-18)고 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듣는 모든 메세지들이 올바른 교리에 맞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여야 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갈 1:7-10). 왜곡된 진리를 미워할 줄 모르면, 사악한 죄를 미워할 줄 모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죄 짓는 것을 경고할 줄 모르면 그가 가진 심각한 병에 대하여 경고하지 않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종종 진리의 왜곡이 아닌, 상대방의 진리의 수준, 믿음의 수준을 자기 의에 맞추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바로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 의에 기준에서, 사랑이나 긍휼이 없는 비판을 하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치 바울이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 14:13)고 하신 말씀의 교훈과 같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 설교의 결론으로 첫째, 비판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37절상) 하셨습니다. 여기 ‘비판하다(judge or condemn)’는 단어는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되는데, 오늘 본문의 문맥상 그 뜻은 ‘어떤 사람의 말과 행위의 동기를 비판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자기 의의 기준으로, 사랑이나 긍휼이 없이 자기 개인적인 판단과 기준에 의하여 비판하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이런 불의하고 무자비한 비판은 금해야 하는데 그 첫째 이유가 그러한 비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명령이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히가 정죄를 받지 아니할 것이요”(37절중)고 하셨는데, 여기 ‘정죄하다’는 뜻은 비판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 것을 말합니다. 최종 심판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마지막 심판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의 동기를 비판하며 정죄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 심판하실 텐데 내가 하나님 자리에 서서 판단하는 격이 됩니다.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은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니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하시면서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하는 것에 개의치 않고, 자기 자신도 판단하지 않고 다만 주께 맡긴다고 합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바르게 판단하여 심판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계속 잘못된 교리와 비성경적인 기준을 따라 가르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내 자신의 기준으로 어느 누구의 일도, 그들의 삶도, 그 동기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교우들에게 그렇게 비판하고 정죄하면 안됩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1-12)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든지 어떤 사람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행하지 않은 것과 우리가 믿기로 그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무자비한 정죄를 하고, 심판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잘못 생각함으로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온전하다고, 의롭다고 믿고 자신들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세워놓은 기준을 하나님의 기준이라고 잘못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은 심판하는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최후의 심판관의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의 모든 것, 모든 사실, 환경, 그 동기 등을 다 알고 있는 심판장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 다른 사람을 불공정하고 무자비하게 비판하고 정죄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역할을 하시면서, 그런 모든 비판과 정죄 위에 여러분 자신을 올려 놓는 것이 됩니다. 비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이 우리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gossip을 한다거나, 험담과 비판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은 나보다 못하다, 내 아래 있다’ 라고 착각하기,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비판은 부메랑과도 같습니다.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우리가 비판도, 정죄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마 7:3) 라고 예수님께서 꾸짖었습니다.

셋째로, 비판하고 정죄하기 보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37절하)라고 하셨습니다. 설상 크게 잘못했더라도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마치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고, 이어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과실을 용서 받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 참된 백성의 마음과 태도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심령이 가난하며, 겸손하고,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애통합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하심을 간구하여, 우리가 죄 사함을 얻고 청결하게 되었을 때에야 하나님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잘 볼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심판장이시며, 다른 사람도 우리와 똑 같은 죄인임을 보게 됩니다. 우리 형제들을 다 비슷한 수준의 형제들로 보게 되며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필요들을 보게 됩니다. 주님 앞에서 비교해 보아야 도토리 키 재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고 하였습니다. 다른 형제들의 죄를 confront 할 때에는 교만이 아니라 반드시 온유와 자비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또한 우리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남에게는 무자비한 위선을 나타내서는 안됩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지만 교회 안에서 잘못된 교리나 진리를 왜곡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있습니까? 성도는 필요할 때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영 분별력은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38절)고 하셨습니다.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도 말아야 함은 물론이고, 용서하고 나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주라고 합니다. 관용을 베풀어라, 관대(generous) 하라는 명령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절하)는 말씀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누가복음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36절)고 하신 것처럼, 자비를 베풀라, 은혜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적당히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라는 것입니다. 당시 곡식 부대에 곡식을 담아주곤 할 때에 적당히 담아도 한 부대가 다 가득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말고 마치 굵은 콩이나 밀 사이에 작은 깨나 조를 섞어서 빈틈이 없이 누르고 흔들어 채워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절하)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혹시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서 정죄하지 않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시고 성경 66권을 주신 주권자 하나님 아버지만이 심판자이심을 잊고, 우리가 그 자리에서 심판하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우리보다 낮게 보면서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며 비판하지는 않습니까? 다 똑 같은 죄인입니다. 나도 죄인인데 자신을 바로 보고 있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사실 다른 사람들을 비판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질투나 열등감에서 나오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귀한 자임을 알고 있는 분들은, 자존감, 자긍심이 있는 분들은 그렇게 비교하며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함 받고 나서 다른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물론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악한 죄를 다 용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복음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에게 계속 열정을 품고 겸손과 자비로 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상하게 할까 조심하여야 합니다.
다만 자꾸 내 기준으로, 내 생각과 경험으로만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정죄하려고 하는 큰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나도 부족한 것이 많은데 온유하게 사랑으로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놀라도록 후히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보고 듣고 계십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적당히 하면 적당한 은혜가 돌아오고, 넘치도록 풍성히 베풀면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안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자꾸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려는 사탄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잘못된 비판을 하지 않고, 옳은 판단력 아래 영을 분별할 수 있는 성령의 조명이, 깨우침이 늘 있기를 축원합니다. 비판 대신에 오히려 용서하고 자비와 은혜를 풍성히 베풀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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