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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4-08 (수) 00:25
분 류 특별설교
ㆍ조회: 908    
오늘날의 빌라도? (요 18:28-40)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셋째날
고사성어 가운데 일석이조(一石二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꿩 먹고 알 먹고’라는 속담처럼 한 가지 일을 해서 두 가지 이득을 본다는 일거양득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 가운데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고 양 다리를 걸치다가 한 마리도 못 잡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두 마음을 품은 자를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약 1:8).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 첫 설교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6:24). 아니 성경 전체의 교훈이 하나님 아니면 사탄, 성령 아니면 악령, 의의 종이 아니면 죄의 종, 하나님 나라 아니면 세상 나라로 뚜렷이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온 마음(全心)으로, 한 마음(一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제일 첫째 되는 계명으로 지키라고 하였습니다(신 6:5; 마 22:37). 이렇게 하나님에게 마음을 다 쏟아 붓는 것이 믿음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납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 당하시고, 안나스 앞에 끌려가 심문 받으신 후에,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심문을 당하시고(마 26:57-67; 막 14:53-65),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심으로 신성모독죄로 판결 받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져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이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제국 티베리우스 황제의 총애를 받던 최고행정관 세야누스의 도움으로 속국인 유다 나라에 파송된 총독으로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재판정에 원고와 피고가 함께 있지 않고, 피고만 있습니다. 원고인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맞아 잔치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이방인의 재판정에 들어가면 더럽혀 진다고 들어가지를 않고 바깥에서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28절).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님께 질문할 때에는 재판정 안으로 들어가고, 또 고소하는 유대인들의 말을 들으려면 밖으로 나오면서, 즉 들락날락 하면서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29절, 33절). 얼마나 보기가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살펴보겠지만 빌라도를 가만히 보면 그는 인생을 이렇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우유부단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재판정 밖으로 나아가 유대인들에게 무슨 죄목으로 예수님을 고소하느냐고 물으니(29절), 행악자라고만 하지 분명한 죄목을 밝히지 않습니다(30절). 그래서 너희들도 법이 있으니까 그 유대법에 의하여 재판하라고 합니다(31절상). 그러자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31절하)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법정에서는 신성모독죄로 판결했지만, 신성모독죄가 로마인들에게는 전혀 죽일 죄가 되지 않기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는 죄목으로 지금 고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주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절)에 물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로마제국이 유대 나라를 다스리고 있어서 그렇다고 하면 로마 황제가 유대 나라의 왕이기에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반역죄와 같은 큰 죄목으로 판결이 나야 십자가 처형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공의회에서는 유대법에 의하여 신성모독죄는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그런 죄목으로 사람을 함부로 죽이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안나스나 가야바 대제사장 앞에서 와는 달리 상당히 인격적으로 그를 대하면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내게 한 말이냐”(34절)? 그랬더니 빌라도가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고, 유대 사람들과 대제사장이 고소하여 데리고 왔으니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묻습니다(35절).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왕이지만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나라, 유대나 로마의 왕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의 종들이, 천사들이 싸워서 자신을 붙들리지 않게 했을 것이고 그들을 다 처단하여 빌라도 앞에 끌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진지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왕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재차 묻습니다. “네가 왕이 아니냐”(37절상)?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37절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인데, 그 나라에 들어가는데 중요한 것이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이 진리를 듣는다고 하십니다. 여기 듣는다는 헬라어 원어의 뜻은 히브리어에서처럼 순종의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지금 빌라도는 생전 처음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묻고는 재판정을 나갔다고 합니다(38절). 진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판단하고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그는 너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아 버립니다. 심령이 부한 세상 권력에 빠져있는 사람이었기에 진리를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밖에 있었기에 얼마든지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재판정 밖으로 나아가 유대인들에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38절하)고 하면서, 머리를 씁니다. 당시 유월절이 되면 총독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죄수 한 명을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그 관례대로 “유대인의 왕” 예수님을 놓아주면 어떻겠느냐고 말입니다(39절). 사실 빌라도로서는 예수님에게 상당한 호의를 베푸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빌라도에게 필요했던 것은 주님을 향한 그런 호의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었어야 했습니다.
헌데 그런 처신이 일석이조, 일거양득을 보려고 잔꾀를 쓴 모양이 되었습니다. 공의도 세우고 민심도 얻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대 군중들은 소리질러 외치면서 예수님이 아니라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합니다. 사실 빌라도는 그들이 예수님과 비교도 안되는 살인 강도인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외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시다시피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맙니다. 심지어 그의 아내조차 불길한 꿈을 꾸게 되어 말렸지만(마 27:19), 군중들의 여론에 밀려 예수님을 내어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혹시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이런 빌라도의 모습은 없는지요? 빌라도의 우유부단한 모습, 이랬다 저랬다 하는 모습, 그의 처신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없습니까? 스스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판단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나뉘어 있지는 않은지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나뉘어 있지는 않은지요. 그 마음이 전심입니까? 아니면 세상에도 적당히 한 발을 담그고, 한 발은 교회에 담그면서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사회생활의 대인관계에서도 우유부단한 사람들보다 화끈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맺고 끝내는 것이 분명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빌라도처럼 군중들의 압박, 여론에 밀려 진리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줄까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사람을 의식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진짜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 받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 인정 받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 진리를 잊고 자꾸 머리만 굴리며 정치를 통해, 권모술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까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지는 것입니다. 아니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오늘도 주권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문제에 부딪히게 될 때 하나님께 나아가야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셔서 문제들을 해결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의 어떤 위협이나 공갈, 협박 속에서도 타협하지 마시고, 올곧은 길을 당당하게 가십시오. 기껏해야 죽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정말 죽기를 각오하고 산다면 그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감히 사탄, 마귀들이 어쩌지를 못합니다.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런데 빌라도 같이 살면 어떻게 됩니까? 그의 말년에 대하여 정확한 역사적인 기록은 없지만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로마 칼리굴라 황제 때에 자살을 했거나, 네로 황제 때에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의 빌라도는 되지 마십시오.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양자 택일이 싫어서 양쪽을 다 택하는 것은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라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중간을 택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느 길을 갈 것인지,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지, 세상 나라 방법을 따르든지 하나님 나라 법을 따르든지, 사탄 마귀의 종으로 살든지, 진리를 따라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주님의 종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든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모쪼록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 편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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