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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4-10 (금) 04:44
분 류 특별설교
ㆍ조회: 142    
다 이루었다 (요 19:28-30)


정사기념예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이 분명했기에 대중의 인기에도, 사적인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어제 새벽에 말씀드린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다섯째 말씀, 오늘 본문에서 “내가 목마르다”(28절)라고 하신 것은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 22:15)라고 메시아의 고통에 관한 예언을 성취하시는 말씀이며, “목 마르다”라는 주님의 음성에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그 입에 대셨다는 29절 말씀은 “저희가 쓸개로 나의 식물을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 69:12)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래서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28절) 한 것입니다.
헌데 마태복음에서는 “골고다 즉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셨더라”(마 27:33-34)고 하였고,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막 15:22-23)고 한 것을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심히 목마른 가운데 그들이 주는 신 포도주를 입가에 대셨을 뿐 마시기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여기 신 포도주는 쓸개와 몰약을 탄 포도주였습니다. 당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마취제로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신 포도주로 십자가의 고통을 못 느끼게 되는 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하시는 십자가의 형벌은 우리 죄인들을 향하여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다 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취제로 고통을 회피해서는 안 되는 고난이었습니다.
심하게 목이 탈 때에 받는 고통을 죽음의 고통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런 정도의 고통을 당해본 일이 없지만 당해보신 분들은 지금 십자가 상에서 목이 타는 주님의 고통을 조금 이해할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에 물이 없어 목이 타고, 입 천장이 들러붙게 되자 고통이 너무 심해서 하나님께서 그 동안 보여주신 기적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 원망까지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십자가 상의 주님처럼 피를 쏟으면서 생기는 갈증은 자기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물을 마시고 싶어할 만큼의 극도의 목마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위의 주님의 고통은 실제로 당하신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그래도 참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마음은 온통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공생애 초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나타났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죄 씻음의 표인 세례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죄인들과 하나됨을 알리시려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는 필요한 일이었기에 기꺼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늘의 문이 열리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5)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던 것이며,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머물렀던 것입니다(요 1:32).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온통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갈망으로 가득할 것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세상의 즐거움, 안목의 정욕, 육체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이생의 자랑에 온통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연로하신 노부모에게 대하듯이, ‘하나님 자꾸 내 생활에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세요. 좀 가만히 계셔요. 내가 알아서 섬겨 드릴 테니까 잠자코 계세요. 그리고 그 이상 제게 무엇을 기대하지 마세요. 지금도 제 나름대로는 힘껏 섬겨드리고 있는 거에요’하면서, 마지못해, 억지로 매달 용돈 얼마 드리는 것처럼 헌금하며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극도의 목마름을 통해서라도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순종을, 특별한 헌신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 살려고 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뜻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우리의 마음이 온통 하나님 나라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한편, 십자가 상 여섯째 말씀인 ‘다 이루었다’(30절)! 하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온갖 고통 중에 숨을 거두시는 거의 마지막 순간에 하신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헬라어 원어 tetevlestai 의 뜻은 ‘단번에 완전히 끝내다’ 라는 말입니다. 같은 단어가 ‘다 마쳤다’, ‘다 지불되었다’, ‘다 필했다’, ‘다 응했다’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단어의 의미는 주님의 구원 사역, 구속 성취의 승리를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율법 성취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인간이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시면서 ‘다 필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 죄 값을 단번에 지불했다는 선언입니다. 영원히 다 갚아 버렸다는 내용입니다. 그 값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생명이었습니다. 이 또한 예언 성취의 선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중심은 예수께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실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승리 선언은 모든 예언 성취의 선언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용서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사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조화를 이룬 곳이 바로 구약시대 성막이나 성전에서 드려지던 제사였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와 제물들은 오직 십자가를 향하여 달려왔던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 사건 하나를 고대하고 바라보며 달려온 역사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2-4)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참으로 은혜의 시대입니다. 누구든지 복음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을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곳이 십자가 상이었음을 생각하면 교회가, 성도들이 영원히 붙잡아야 할 진리는 십자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속한 것이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들이 아니요, 오직 흠 없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그의 생애에서 꼭 한번 하셨습니다. 수 많은 기적들을 베푸신 후도 아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도 아니었습니다. 죽을 병을 고치신 후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십자가 상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 죄의 심판 아래 있는 백성들의 소망은 보리떡이나 물고기나 병 고침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사흘 후에 있을 부활의 영광이 있기 전에 이런 극도의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우리 믿음 생활이 낭만적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훗날의 영광을 맛보기 전에 이 땅에서 우리가 실제로 당하는 고통이 있고, 고독이 있고, 쓰라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만나는 사탄, 마귀들의 어떤 도전에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전쟁을 겁내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날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유혹을 거절해야 합니다. 고난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의 풍조는 성공, 무엇이든 잘되는 것에 있습니다.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 풍조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서 성도들이 고난보다는, 거룩한 삶보다는 성공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저 아프지 않고, 돈 잘 벌고, 명예를 얻고, 사람들에게 인정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극도의 목마름의 고통 가운데서도 참으시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면서 숨을 거두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가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고통을 참으신 원인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매우 강합니다. 이 사랑이 없는 사람은 고통을 당할 때 비명을 지를 수 있지만, 이 사랑이 있는 사람은 고통을 당해도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 “내가 목마르다”라는 주님의 외침은 그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이 사랑을 입었는데, 이 사랑을 받고 사는데, 또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사탄은 완전히 패배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자신이 승리한 줄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져,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기에 인간들은 죄와 율법에서 해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옮겨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이 내주하게 되어 구원의 새 사람으로 새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용서 받지 못한 죄인들에게만 아니라,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신 생명을 누리는 근원이 됩니다. 십자가를 날마다 묵상하고 거기서 위로와 고난을 이기는 용기와 사랑을 힘입어 이 어두운 세상을 넉넉히 이겨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목적이었습니다. 죄로 인한 저주와 진노는 자신이 모두 당하시고 은혜와 사랑만이 십자가로부터 강 같이 흘러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강에 깊이 잠기기를 사모하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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