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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4-26 (일) 09:3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3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눅 8:40-56)


요즈음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말할 것도 없고, 미국에서 여태껏 5만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메릴랜드 주에서만 매일 수십 명이 죽어갑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간디도 죽음 앞에서는 사람이 만든 종교, 힌두교가 죽음에 대한 해답이나 위로를 주지 못함을 깨닫고 갔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이 땅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였고, 그 저주는 재앙과 눈물과 질병과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베다니 동네의 마르다가 남동생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피 우는 것을 보시고 자신도 슬피 울며 마음 아파하시면서(요 11:33-38),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함께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죄의 결과가 사람에게 주는 큰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죄는 원래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모든 세상이 창조될 때에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 선하신 뜻이 피조물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사람에게 복을 주기 위한 창조이었으나, 죄가 들어온 후에는 선한 세상과 모든 축복이 저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창 3:16-17).
하지만 이 세상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죄는 그 수명이 다할 날이 옵니다. 영원히 사라질 날이 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고 하였습니다. 아멘!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하기를 오실 메시아는 ‘상처와 아픔을 싸매실 능력의 주’로 예언하였는데(사 30:26; 35:5-6; 말 4:2), 정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그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 내셨으며, 죄를 용서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천국에 대한 맛을 보게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 왕의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릴 때에 그 제자들이 예수께 찾아와 참으로 메시아이냐고 물었을 때에, “너희는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5)고 답하셨습니다.
즉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적들은 자신이 이 땅에 임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의를 회복시키고, 화목과 평안을 가져다 주시는 메시아임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사 53:4, 마 8:17).

그런데, 오늘 본문의 기적은 죽었던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살려주셨던 것처럼(눅 7:11-16).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회에서 버림받은 혈루병 여인을 또한 고쳐주십니다.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궁지에 몰려 기적을 바라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주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의 능력과 함께, 그 온유함, 민감함, 또한 그의 열린 마음,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신분적으로 큰 차이가 나는 대조적인 두 사람을 아무런 차별 없이 기적을 베푸십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신 데가볼리 지역 거라사인들에게서 배척을 당하시고,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 아마도 가버나움 지역으로 돌아오시니 무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을 환영을 합니다(40절). 그 때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12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41-42절상)고 합니다. 야이로는 유대인으로서 아마도 가버나움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던 자라고 여겨집니다. 회당의 모든 행정과 운영의 책임을 지고 있으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지도자인 그에게 12살 난 외동딸이 죽을 병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12살 여자는 이제 여인으로 취급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남아가 13살이면 성년식을 갖고 남자로 취급 받듯이 말입니다.
회당장인 그가 예수께 나아가고자 하였을 때에 분명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반대에 부딪쳤을 것입니다. 그래도 죽어가고 있는 사랑하는 외동딸을 살리기 위해 겸손과 진지함의 태도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동료 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하지 않고 딸을 살릴 수 있는 도움은 오로지 주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나왔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이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데는 거리낄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에는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물론 무엇보다도 그가 주께 나오게 된 이유는 1) 딸이 죽을 병이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종종 큰 비극적 사건을 만남으로 그들을 주께로 나오게 합니다. 어떤 필요도 못 느끼는 사람은 주께 나올 수가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주님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에 첫 단계가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 주님이 그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분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야이로도 딸을 살리는데 도움을 주실 예수님에게 나아왔던 것입니다. 2) 그가 주께 나오게 된 이유는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나 많은 군중들이 몰려 들어서 그를 홀로 있게 두지 않았습니다. 그 군중들 가운데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비판적인 유대종교지도자들, 또 호기심에 가득차 있을 뿐 헌신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죄책감에 쌓여 죄 사함을 원하거나 질병으로부터 고침 받기를 원하여 주께 나온 자들 등 말입니다. 바로 자신의 필요를 가지고 주께 나온 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돌보시고, 사랑하시며, 그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분으로 믿고 그에게 나아갔기에 그 필요들이 채워졌습니다. 물론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주님은 결코 너무 바빠서 당신의 백성들을 돕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자기 집에 와달라는 요청에 금방 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42절하)고 하였습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그에게 가까이 가기가 쉬울 뿐 아니라 스스로 가까이 다가와 오시는 분입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야이로의 집에 가시지도 않고 그 딸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예- 7장 로마 백부장). 그러나 자신의 희생적인 사랑과 열정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일부러 야이로를 따라 가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다가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나가셨던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무리들의 필요에도 민감하시지만, 한 개인의 울부짖음에도 민감하신 분입니다. 한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하기 위하여 큰 사역을 잠시 멈추시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는 약속의 말씀대로 말입니다. 할렐루야!

무리와 함께 야이로의 집에 가는 도중, “이에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한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43-44절)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이 나갔음을 아셨습니다(46절). 그래서 자신에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다 아니라고 대답합니다(45절). 베드로는 지금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중이기에 누구나 예수님의 옷에 손이 닿을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누군가가 자신의 옷에 손을 대어서 능력이 나타났다고 합니다(46절). 그러자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 고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7-48절)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야이로와 그 12살 난 외동딸에게만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12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에게도 민감하신 분입니다. 가는 길에 잠시 방해가 되었는지 몰라도 오히려 또 다른 사랑의 능력의 베푸시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야이로처럼 이 여인도 오직 예수님만이 자기를 도와줄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가족에게도 배척을 당하며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혈루증은 일종의 종양으로 자궁에서 피가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병을 고쳐보려고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 다녔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43절).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혈루증이 있는 사람은 부정하다고(레 15:19-33) 하여 회당에도 못들어 갑니다.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염 가능성이 있기에 모두가 그녀를 피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그 군중들 틈에 끼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주님의 옷 자락 만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께 가까이 가서 그의 겉옷 자락을 만지기만 하면 낳을 것이다’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몰래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는 ‘아무도 모르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만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알자 이 여인은 벌벌 떨며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안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9:22).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혈루병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유대인들에게는 비난 받을 일이지만 그것보다는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녀에게 육체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영적인 구원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딸아’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놀라운 특권이, 복이 주어졌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에게는 지위 높고 부자인 회당장 야이로든, 회당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가난한 불치병 여인이든 똑같이 대하십니다. 편애하지 않습니다. 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사건 사이에 이 사건이 끼어 들어 갔다고 생각합니까? 바로 우리 주님의 어떤 분인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학식이 많던 적던, 돈이 많던 적던, 유명하던 무명이던, 어떤 인종이든지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 주께 찾아 왔을 때에 어느 누구도 거절당하지 않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 21:28)고 하신 것처럼 죄인을 섬기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결코 불순종을, 어떤 죄를 받아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오면 그의 대속의 죽음 아래 그 어떤 죄도 용서하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그 여인과 말씀을 나누고 있을 때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종이 와서 야이로에게 외동딸이 죽었다고 소식을 전하면서 이제는 선생 예수님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49절). 죽었으니 이제 늦었다는 말입니다. 낙심하는 야이로에게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50절)고 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듣고 회당장 야이로는 믿음이 더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딸을 앞에 놓고 주님께서 딸의 몸에 손을 얹으시기만 하면 살겠다고 고백합니다(마 9:18).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두려워 말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약속의 말씀을,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담대하게 헤쳐 나가게 하실 줄 믿습니다.
회당장 집에 도착해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야이로와 그의 아내만 데리고 들어갑니다(51절). 이미 집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통곡을 하며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52절) 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예수님은 그가 잔다고 하였듯이(요 11:4, 11), 바울도 우리의 죽음을 잔다고 표현하였습니다(엡 5:14, 데살전 5:10). 그러나 믿음이 없어 무슨 말씀인지 모르는 조객들은 비웃었습니다(53절). 오늘날도 진리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지와 불신앙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54-55절)고 명하였습니다. 누가가 의사가 아니었습니까? 불신자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 딸이 정말 죽은 것이 아니라 코마 상태에 있었다가 깨어났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확실하게 반박할 수 있도록 그 딸의 영혼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아닙니까? 분명히 그 영혼이 떠났던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그 영혼이 돌아온 것입니다. 살아났고, 먹을 것을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살리실 줄은 믿었지만 실제로 눈 앞에 죽었던 딸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그 부모가 놀랐다고 하였습니다(56절). 그리고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가 되지 않아서 그렇게 예기 하였거나, 사람들이 개인적인 욕심으로 자신을 따르게 될 것을 경계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놀라운 기적을 본 사람들이 주위에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다 전하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주님은 쉽게 누구나 접근할 수 있으며, 또 주님께서 자신에게 나오는 사람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리고 차별 없이 그 필요에 따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좀 능력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바쁘다고 하거나, 한눈을 팔면서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바쁘다고 해서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한눈을 파시는 분이 아닙니다. 늘 우리를 향하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작은 일들조차도 다 하나님의 섭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누구나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전능하신 주님입니다. 확실히 믿고 주님을 찾고,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믿는 자들은 주님 안에서 더 이상 질병이나, 귀신이나, 어떤 비극적이 사건도, 아니 죽음까지도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오더라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분이시기에 사망도 우리를 어떻게 못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지언정 우리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어 하늘나라, 예수님 계신 곳으로 옮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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