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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6-07 (일) 08:3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2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눅 9:18-22)


우리는 때로 사람을 잘 몰라서 혹은 잘못 알고 있어서 낭패와 실망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올바로 잘 알아야 할 사람이 중요한 사람일 때는 더욱 당혹스럽습니다.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할 아내나 남편을 결혼을 하고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다면 그 결혼은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배우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을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으면 한 평생이 아니라 영원히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어떤 분입니까?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진실하게 대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모든 인간이 응답을 해야 할 궁극적인 질문이 바로 ‘예수님이 누구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달린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느 누구나 이 질문에 반드시 대답을 하여야 합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훗날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 답이 죽은 후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은 누가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지난 주일 살펴본 벳세다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 보이자 무리들이 그를 억지로 왕을 삼으려고 하였습니다(요 6:15). 그러자 예수님이 급히 그 자리를 피하여 따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18절; 마 14:23). 그 무리들을 떠나 예수님이 기도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오병이어 사건 전에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병을 고치는 능력과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베푸는 것을 듣고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세례 요한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아니면 옛 선지자 하나가 살아났다’ 하자 당황하여 도대체 예수님이 누군지 보기를 원하였습니다(눅 9:7-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는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18절하),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19절) 고 대답합니다. 헤롯이 들은 것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여기 무리들이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 사람들의 생각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만, 제자들이 알고 있는가 시험하는 것입니다. 불신앙과 외식으로 가득한 유대인들의 대답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이 어떠한지 관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 동안 주님의 교훈도 들었고, 기적도 체험하고 나서 무리들의 주님에 대한 판단이 어떠하다고 들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한다고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아마 세례 요한의 목을 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두려움(마 14:1-2)에 공감하는 자들과,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엘리야, 즉 불수레를 타고 올라간 엘리야가 다시 세상에 온 것으로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로 여긴 엘리야에 대한 예언,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존경 받는 구약의 예레미야나 아니면 그와 같은 선지자의 하나로 여겼습니다(마 16:14). 외경인 마카비후서 2장 4-8절에 의하면 성전의 언약궤와 번제단을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하여 파괴될 것을 피하여 예레미야는 그것들을 느보산에 감추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와서 이 땅에 그 나라를 건설하기 전에 예레미야가 돌아와 언약궤와 번제단을 되찾아 성전에 돌려놓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선지자 중의 하나로만 여겼습니다.
이 모든 경우가 다 예수님을 오실 메시아의 선구자(forerunner)로 여길 뿐이지, 메시아로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그리스도, 구세주로 영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오늘날까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높이 평가하며, 그저 도덕군자 혹은 성인 중 한 사람으로 여길 뿐이지 그의 신성이나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렇게 비슷하게 말하고 있습니까? 다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로부터 무리들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지 들은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0절상)? 12제자들은 그 무리의 대답이 부적절함을 알았기에, 그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20절하)! 마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마 16:16)라고 고백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12제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는데, 초대 교부인 크리소소톰은 베드로를 가리켜 ‘the Director of the Apostolic Choir’라고 불렀습니다.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아주 간단하고도 결정적인 고백입니다.
그는 먼저 예수를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Xριστός)란 히브리어의 메시아(Messiah)의 헬라어 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예언한, 이스라엘의 구세주, 최상의 기름부은 자, 대선지자, 오실 대제사장,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를 뜻합니다. 베드로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예수님을 가리켜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안드레가 처음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를 메시아로 고백했으며(요 1:41), 나다나엘은 주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 유대인들처럼 제자들도 메시아가 오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대적들로부터 구원하여 이 땅에 그 나라를 회복하여 세워서 영원히 통치할 영광의 메시아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즉 제자들조차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50%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께서 압제하는 로마 정권을 대항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심을 보고 정말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의아하게 생각하였었습니다. 그의 겸손함, 온유함 등은 그들이 알고 있는 메시아의 성품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아가 핍박과 조롱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 땅을 떠나서 다시 올 것이라고 할 때에, 도마는 대경실색하며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니이까”(요 14:5)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21-22절)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자(Son of Man)라 함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보통 사용하신 말로 복음서에 약 80번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이 단어가 메시아에 대한 명칭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단 7:13). 그러나 인자라는 말은 메시아의 인성을 강조하는 것이었기에 유대인들은 사용을 꺼려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유로 사용하기를 즐겨 하셨는데, 그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겸손과 순종에 있고, 희생적인 대속의 죽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자들은 속으로 ‘아니 어떻게 우리가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구원과 회복의 근원인 하나님의 메시아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말아요?’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자신이 제자들이 고백하는 메시아이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와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해하기 때문에 이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제국의 핍박을 받아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승리가 있기 전에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메시아는 고난의 메시아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마태에 의하면 베드로의 신앙고백 안에는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을 가리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이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시며 주권자이십니다. 무슨 전설이나 신화에 나오는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물론 앞서 언급하였듯이 12제자들이 나중에 주님에 대하여 한 말이나 행동을 보면 이 신앙고백의 삼위일체의 하나님, 예수님의 전체 사역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말 그리스도이며, 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이라 함은 그 아버지와 본질이 같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요 5:17-18; 10:30-33). 즉 예수님의 부활이 있고 난 후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우리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 위대한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합니다. 그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듣고 주님은 그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신앙고백의 참된 뜻을 알았을 경우를 의미합니다.
정말 누구든지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구세주로 고백하고 관계를 맺은 자들은 영적으로 영원히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초자연적인 신령한 복을 부어주십니다. 그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고백을 하게 하신 이가 육신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교회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올바른 신앙고백하지 못하는 이단이 얼마나 많습니까? Christian Science 에서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마리아의 자의식적 영적 교통의 소산이며 그 잉태가 영적인 것으로, 그리스도도 형체는 없으며 영적이며, 예수는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몰몬교에서는 예수는 ‘아버지인 동시에 아들이다’라고도 하며,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는 인간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로 천사장 미가엘이 현현한 것이며 하나님이 그를 창조했다. 영원히 죽었다. 영적으로는 부활했어도 육체로는 부활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제 7일 안식일 재림교에서는‘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으로, 우리와 똑같은 타락한 인성을 입었다.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유일신교(Unitarianism)나 New Age Movement에서는 예수는 사람이었다. 그의 출생이 신적인 것처럼, 우리의 출생도 예수의 출생처럼 신적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서론에 말씀드렸듯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저 도덕군자나 성인 정도로만 알고 고백합니다. 이 모두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사탄의 소리입니다.
한편 초대교회 때에 로마의 심한 박해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땅을 판 지하 묘지, 카타콤에서 살다가 죽은 많은 신실한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로마 주변에 약 10여 곳이 있다고 하는데, 그 길이가 350-900마일로 4-6층으로 되어 있는데, 약 400년 간을 거기에서 그들이 살았는데 약 7백만의 묘가 있다고 합니다. 그 카타콤에 매장된 자들의 비문등이 많이 발굴되어 박물간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거기 나타난 대부분의 비문이나 조각은 모두 성도들의 순교, 부활 소망, 영생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이 그들의 신앙고백의 표시인 익투스(Icquvj), 물고기의 표시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라는 헬라어의 머릿글자를 모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고백과 동일한 이 신앙고백이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요점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가리켜 누구라고 합니까?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심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카타콤에서 신앙을 지켜간 성도들처럼, 익투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 라고 고백하십니까? 예수님의 아버지가 여러분의 아버지입니까?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신앙고백 때문에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오늘도 저 북한 땅에서는, 모슬렘권에서는 이 위대한 신앙고백 때문에 진실한 성도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민 생활이 많이 힘드십니까? 초대교회 당시보다는, 북한에서 고생하는 성도들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을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여러분의 그리스도, 구세주라고 고백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영광이 있기 전에 고난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던 것과 같이 오늘날 예수님을 익투스(Icquvj)로 고백하며, 그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께서 더욱 그 진리와 능력을 체험하도록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러한 신앙고백 속에 고난 중에라도 그 영광을 바라본다면 점점 그를 닮아갈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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