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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6-14 (일) 22:3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17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입니까?(눅 9:23-27)


예수님을 익투스(Icquvj),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스승인 예수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따라가며 닮아가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물론 성숙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제자도 즉 제자의 삶의 기본적인 원칙이 무엇인지 알고 그 원칙대로 살아가야 참 제자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12제자는 아직도 영광의 메시아만을 생각하고 있지, 고난의 메시아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눅 9:22) 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참 제자도의 기본원칙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목숨, 생명(life)과 관계된 아주 중요한 교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참 제자인가? 참 제자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3절)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익투스의 고백을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세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로, 자기 부인입니다. 자아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욕망, 야망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즐겁게 하려는 것을, 자랑하기를 멈추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고전 15:31). 둘째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늘날 금으로 만든 목걸이 십자가를 말하는 것 아닙니다. 예술가가 멋지게 만들거나 그린 십자가도 아닙니다. 교회당 위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도 아닙니다. 당시 십자가는 멸시와 천대,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저주였습니다.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익투스라는 믿음의 고백 때문에 제자 자신이 앞으로 당할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그 후에 주어질 영광, 상급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려 함이니”(고후 4:17) 하였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좇을 것이니라(ἀκολουθείτω)’는 동사가 헬라어 원어의 현재명령형입니다. 그 뜻은 뒤에 바싹 붙어서 같은 방향으로 계속 따라가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어도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 6:46)라고 꾸짖은 적이 있습니다. ‘주여’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참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24-25절)라고 합니다. 헬라어 원어에서는 24절 서두에 ‘왜냐하면(γὰρ, For)’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참 제자도의 원칙대로 살아야 할 이유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이유는 목숨(생명)이라는 개념에 대한 역설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육체적인 목숨(생명)은 사실 생명이 아닙니다. 사탄 마귀가 공중권세를 잡고 있기에 온갖 악이 흥행하는 이 세상에서의 목숨은 일시적이며, 쉽게 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른 채,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은 후의 둘째 사망으로 부활하게 되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해도 무슨 소용dl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귀영화와 자기 자신의 목숨을 바꾼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삶입니까? 대신 참 제자로서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게 되면 구원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life)을 너무 사랑하는 것이 종종 주께 헌신하는 데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을 봅니다. 로마 제국 아래 팔레스틴 지역에 살던 사람이면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십자가에 비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잔인한 남편, 패역한 자식, 죽을 병, 심지어 내 집이 불에 타거나 물에 떠내려 가는 시험들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은 아닙니다. 생명을 내 놓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 제자는 자기 목숨(생명)까지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생명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 생명이 전부인 줄 알고 붙잡는다면 잃어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하여 이 세상 잠깐 누리는 생명까지 버린다면 그는 기념비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 순교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포기할 수 있는 자가 참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제자도의 원칙으로 살아야 할 둘째 이유는 예수님의 심각한 경고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26절)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였습니다. 즉 어떤 제자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의지적으로 십자가 고난의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면 훗날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그를 참 제자로 인정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시인하다"의 뜻은 ‘동의하다, 확인하다’로, 단지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시(identify)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마귀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하였지만(약 2:19), 그를 참으로 시인하며 믿는 것은 전혀 아니지요. 우리도 단순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acknowledge)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세주(Savior)요 주님(Lord)으로 영접하며 믿고, 주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시인하지 않습니까?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하였고, 또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고 하였습니다. 참 제자는 어디에서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공적으로 주님과 하나됨을 시인합니다. 그것이 신부로서 영적으로 신랑이 되는 주님과 결혼한 세례식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기에 전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유는 주님의 구속사역이 아니고는 이 썩어져 부패하여 가는 세상에 구원이, 소망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들 이후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주님을 시인하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제자들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이야말로 가장 신실하며, 효과적인 제자 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자유롭고 편안한 때 주님을 시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현재 미국 생활과 같은 좋은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시인하지 않는다면 신자가 아니지요. 제자라 할 수 없지요.
문제는 북한이나 모슬렘권 나라들처럼 신앙생활하기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나, 개인적인 환란의 시간이 닥칠 때입니다. 오늘날 코로나바이러스로 우리를 시험할 때입니다. 편안하고 모든 것이 잘 될 때에 주님의 몸인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자들이 많지만, 세상이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주고 힘들게 할 때에도 교회를 그렇게 열심히 섬기겠다는 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고 성령을 받지 못한 베드로는 핍박이 올 때에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성령강림을 체험한 후에는 참 제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어떤 환란 가운데서도 주님을 시인하며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경고인 26절 말씀은 우리를 섬뜩하게 합니다. 이 경고는 누구든지 겉으로는, 입으로는 주님을 인정하면서도 시험이 올 때에 믿음을 부끄러워하며 부인하는 사람에게 해당합니다. 아마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잠잠하든지, 증거하지 않든지 하여 별로 드러나지 않기에 친구들이나, 이웃이, 심지어 가족들조차 의심하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적어도 주일성수, 예배 생활, 말씀을 가까이 하는 생활, 기도 생활, 십일조 생활과 같은 신앙생활의 기본적인 것이 안된다면 정말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입으로는 예수를 시인하더라도 행동으로 부인하는, 삶의 목적이나 가치가 세상 사람들과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26절 시제가 미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있을 심판을 뜻합니다. 지금은 잘 모를 수 있어도 참 제자와 거짓 제자가 갈라질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절)고 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세상 끝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셔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나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부활 승천하시고 나서 성령님을 보내주신 후에 임하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예고편이 다음 문단에서 나오는 변화산 상에서의 사건입니다. 제자들의 전도와 치유 사역이나 오병이어의 사건, 혹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그 나라가 임하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나라의 권능과 영광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이 나라에 참여하는 자들은 바로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성령님을 의지하고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참 제자들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는 본문의 말씀 후에 참 제자가 받을 상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0-42)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상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서는 조금 밖에 경험할 수 없는, 하늘나라에서야 완전히 경험할 것이기에 지금은 믿음과 소망, 사랑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제법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을 받아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는 하나님의 사자, 대사, 혹은 대리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께로 인도하는 모든 제자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도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와 우리의 증거를 영접하는 자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사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독생자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한 선지자들을 상 주실 때에, 그 선지자들을 선지자들의 이름으로 영접한 이들도 그 상을 주신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신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상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 원리를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의인의 상을 주고, 제자의 이름으로 소자에게 필요한 물 한 그릇을 주어도 그 상이 반드시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반대로 소자라도 그를 영접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그를 영접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소자라 함은 어린아이를 뜻하기보다 사람의 눈에 별 볼일 없는 중요하지 않은 신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성경을 잘 모르는 신자, 혹은 새 생명을 얻고 난 후 잘 넘어지는 신자, 평생 주를 위하여 수고하였지만 사람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자 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점은 참 제자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어느 신자에게든 어떤 작은 봉사를 하더라도 그것은 곧 주님께 하는 것이요 상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을 따르는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그에 따르는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신 스스로 살려고 하다가는 목숨을 잃지만, 예수님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잃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믿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이 세상에서 떳떳하게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라도 하였습니다. 즉 참 제자는 진리를 인정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 헌신(commitment)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제자들에게는 반드시 상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보다 저 하늘나라에서 큰 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부인하며 고난 가운데서도 희생하며 베푼 작은 수고로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준다면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상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확실히 믿고 참 제자답게 살아 큰 상급을, 영광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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