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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3-01-15 (일) 07:3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405    
빛 가운데 있다 하면 (요일 2:7-11)

살아가면서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이 거짓, 가짜, 위선입니다. 다 사탄 마귀가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 가짜이면서 진짜인 체하는 사람, 위선자등 말입니다. 반면에 진실, 진짜, 투명한 삶 등은 주님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어두움의 삶을 사는 사람들, 사랑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미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고 시험에 드는 경우가,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히려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투명하게 살면 동정을 얻게 됩니다. 사랑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 부족하니까요. 그 분의 실수를, 잘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말로는 사랑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미워하니 서로 아픈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아시는데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이냐 하면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로서, 주님이 행한대로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2:1-6). 그런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과 미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먼저 옛 계명과 새 계명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7절) 하였습니다. 여기 옛 계명은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신 6:5; 레 19:18)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에게 율법학자 서기관이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답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모세오경을 근거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613 계명 중에서 (물론 그 중에는 율법에 없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계명도 포함)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정답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새 계명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입니다. 어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주님(스승)이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고,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더러운 발을 씻겨 주라는 것은 우리 이웃의 가장 추한 부분을 용서하라는, 덮어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즉 옛 계명이 우리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면, 새 계명은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옛 계명과 비슷한데 더 깊고, 넓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본받아 이런 사랑을 해야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13:35). 예수님은 동일한 말씀을 잠시 후 요한복음 15장에서도 하십니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Slide 1]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이유를 8절에 말씀합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8절)! 주님에게도, 제자들에게도 이 참된 진리가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참빛이 비추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빛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어두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탄 마귀가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나라는 어두움이 가득차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헤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이나 담배, 마약의 어두움에, 어떤 사람은 음란의 어두움에, 어떤 사람은 도박의 어두움에, 어떤 사람은 미신의 어두움에, 어떤 사람은 세상 출세나 돈, 성공의 어두움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엉망진창, 뒤죽박죽이었던 삶이 정리정돈이 되며, 썩고 부패한 부분을 잘라 주셔서 깨끗하고 정결한 새 삶을 살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이제 그 빛을 반영하고 삽니다. 새로운 신분으로 살기 때문에 주위에 그 빛을 비추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 주님의 신부가 되었으니 이제는 다르게 삽니다. 겉으로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더 이상 어두운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9절) 라고 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은 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빛의 나라,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10절) 라고 하였습니다. 즉 정말 빛 가운데 거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 양심이 떳떳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양심에 거리낌이, 부끄러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시각장애인과 같이, 등(lights)이 하나도 없는 깜깜한 밤에 산길을 걸어가는 사람과 같기 때문에 거리낌이 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고 하였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사람, 참빛을 받지 못하고 어두운 가운데 사는 사람은 늘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 속에도 양심은 있기에 자신의 허물과 죄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 벨릭스 총독 앞에서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 24:15-16)고 증거한 것처럼,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애쓰고 삽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금방 회개하고 돌이켜 사랑하려고 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사랑은 그저 지적인 사랑도 아니요, 감정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의지적인 사랑의 행동을 뜻합니다. 우리 마음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는 죄의 성향은 사랑하기를 원치 않으나,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지만 그 마음과 생각을 거슬려 의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이 아니라, 누가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어주라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면 겉옷도 주라고, 억지로 5리를 가게 하면 10리를 가주라고 하면서, 우리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원수조차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라고 하셨습니다(마 5:38-44). 그렇게 하는 것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지,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11절)고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다고 합니다. 아니 눈이 멀어져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은 빛의 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미워하면서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라고 하였듯이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5-16)고 하였으니, 정말 미워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것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도 기꺼이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정도로 희생해야 하는데 미워하다니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어두움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진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의 신부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목적으로 살다가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목적으로 살게 됩니다. 나를 위하여 살다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가치관이 변합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어두운 가운데 살면서 좋아하던 것이 다 싫어지고,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소극적으로, 그저 되는 대로 살던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서 그 사랑을 배우며, 적극적으로 그 사랑을 행하고 삽니다. 겸손히 섬기며 살려고 애를 씁니다.
믿기 전에는 누구를 사랑하려면 조건이 있어야 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계속 내 마음에 들게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쉽게 미워하고, 정죄하고 살았습니다. 욕하고 비방하고 살았습니다. 조금만 내 감정을 상하게 하면 금방 미워했습니다. 복수해야 했습니다. 용서가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도, 친 형제, 자매에게도, 친했던 친구에게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 큰 사랑을 깨닫고, 그 큰 은혜를 깨닫고 변화를 받은 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주님을 남편으로 삼았기에 아버지처럼, 주님처럼 아무 조건 없이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잠깐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다가 금방 뉘우치고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유는 빛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화] 2007년에 개봉된 영화 ‘밀양’에서 여주인공(전도연)은 33세에 남편을 잃고 하나뿐인 자기 어린 아들과 함께 고향 밀양으로 이사를 했는데, 거기서 유괴범에게 아들을 잃고 맙니다. 감옥에 갇힌 유괴범을 면회하고 용서하러 온 그녀에게 범인 말합니다. 감옥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니 하나님이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용서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여주인공은 아니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나요’ 라는 생각으로 면회를 마치고 나오다가 쓰러지고 맙니다. 그리고 나서 교회를 떠납니다. 하나님을 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범인도, 여주인공도 진짜 믿음이 있는, 빛 가운데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 그는 자기가 죽인 아이의 엄마에게 용서를 구했어야 합니다. 사죄 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으니까 당신에게는 용서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는 가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아이의 엄마도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여주인공 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범인을 용서했다면, 그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해서 쓰러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래요, 나도 용서합니다’ 라고 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참빛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십니까? 정말 그 빛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주님의 신부입니까? 남편이 예수님 맞습니까? 그러한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사랑하고 사십니까? 아니면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십니까? 그렇다면 어두운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Slide 2] 설교요약
중요한 것은 빛 가운데 거하는 자녀라면 지속적으로 주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고 하셨듯이, 한번 주님 안에 거하고 나서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사랑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면 안됩니다. 한번 계명을 지켜 사랑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한번 의지적으로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면서, 계속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분이 진실한, 진짜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신부입니다. 매일 주님과의 교제하는 가운데, 빛 가운데 거하면서 사랑하고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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