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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3-01-22 (일) 03:3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441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요일 2:12-17)


새해 첫날 첫 주일에 ‘다음 세대와 함께 주의 은혜와 그의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영적으로 자라가는 것이, 성숙해지는 것이 생명을 받은, 성령을 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이기에 우리 아이들이 자라듯이, 우리는 물론 우리의 2세, 3세도 올해에는 부쩍 자라가는, 변하는 모습이 눈에 띄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말씀드렸습니다. 조금씩 자라는 것 같습니까? 바뀌는 것이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2장에 들어와서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의 자녀이냐 하면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로서, 주님이 행한대로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2:1-6). 그런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참빛을 받았기 때문에 새 사람이 되어 그 빛을 반영하고 살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2:7-11). 우리의 삶의 목적이, 가치관이 달라져서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산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산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먼저 참빛을 받아 빛을 나타내고 사는 우리들은 영적으로 자라는데 아이의 때, 청년의 때, 아비의 때의 특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물론 아이든, 청년이든, 아비든 그리스도인들의 대전제는 죄 사함을 받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12절)라고 하였습니다. 2장 1절 서두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처럼, 여기 “자녀들(tekni,on, little children)”은 오늘 본문 14절에 “아이들(paidi,on)”과 약간 다릅니다. 우리말 번역도 다르게 하였듯이 원어가 다릅니다. 자녀들은 일반적으로 부모로부터 난 모든 자녀들을 일컫는 단어라 하면, 아이들은 육체적으로 유아, 유년기의 아이들을 뜻합니다. 인생경험이 많이 없는 아이들 말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tekni,on)이고, 아이들은(paidi,on) 초신자를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 말입니다.

그러므로 12절은, 14절에서 말하는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 모두에게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쓴 것은 중생함을 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았음을 확신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말씀하셨듯이,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저(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43)고 말씀을 전하였듯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음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하시며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고 하였고,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려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첫째, 영적인 아이들에게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14절상)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초신자 혹은 미성숙한 분들이라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기본적인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아직 분별력은 많이 없어도 누가 아버지인지,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기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신자들 같으면 예수님을 만난 감격이 생생하여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며 예배의 감격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감격을 잃어버렸다면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로, 영적인 청년들에게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13절하), 또 동일한 맥락에서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14절하)고 반복하였습니다. 즉 사도 요한에게 영적인 청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탄 마귀와 싸우는 강한 자들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연약한 부녀자들과 노예들이었습니다. 힘있는 청년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핍박하면 핍박당하고, 쫓아내면 쫓겨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청년들이 생겼습니다. 교묘한 이론으로 교회를 어렵게 하는 자들, 겉으로는 그럴 듯한데 실제로는 양의 탈을 쓴 늑대들과 싸웁니다. 진리로 무장한 믿음의 청년들이 그들과 싸워서 사탄의 궤계를 드러내고, 물리치는 것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들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아와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에 대부분은 그들이 장대같이 큰 거인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라고 하면서 도로 애굽으로 도망가려고 했던 자들과 달리,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생각하고 보고했던 것처럼, 우리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용감하게 싸워서 악한 자들을 이겨야 합니다.
셋째로, 영적인 아비들에게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13절상), 또 14절에서도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반복합니다. 영적인 아비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셔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라 는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은 갑자기, 뜬금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획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하였듯이,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이 아니라 뜻을 세우시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따라 오늘까지 구속사를, 구원계획을 주권적으로 이루어 오셨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고 믿어야, 어떤 상황에서도 낙망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즉, 영적 아비들은 이런 전체적인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먹되 편식하지 않기에 일부분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생의 풍랑이 오더라도 멀리 내다보고 현실을 꿰뚫어 보는 지혜가 있습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면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성숙한 어른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아이들이든, 청년들이든, 아비들이든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15절상) 입니다. 여기 “세상”은 사탄 마귀가 공중권세를 가지고 다스리는 나라를 가리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사탄 마귀가 주장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기 전의 우리들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런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나 그 방식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6:24; 눅 16:13).

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안됩니까? 첫째로, 앞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15절하)고 한 것처럼, 우리 안에 두 주인이, 두 사랑이 함께 공존할 수 없기에 하나님 아버지 사랑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바울의 선교사역을 도와주던 그래서 그를 동역자라고 불렀지만, 약 4-5년이 지난 후에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던 데마를 아십니까? 얼마나 서운하고 아쉬웠으면 바울이 임종 직전에 마지막으로 쓴 서신에서 그를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했을까요?
세상을 사랑하면 안되는 두번째 이유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16절)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1) 육신의 정욕이라고 합니다. 여기 “육신(flesh)”은 죄의 성향을 가진 육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본성이 타락하여 드러나는 욕심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욕으로 인한 간음입니다. 이 외에도 정상적인 갈망을 넘어서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라인을 넘어서려는 욕망입니다. 2) 안목의 정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세상을 보라고 우리에게 눈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 눈으로 죄를 짓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탐심을 일으킵니다. 사실 최초의 죄도 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보고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그만 따먹고, 함께한 남편에게 주니 그도 먹고 맙니다(창 3:6). 롯의 아내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보는 바람에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 19:26). 아간도 아름다운 전리품을 보고는 탐이 나서 취하는 바람에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지게 되었고, 그는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수 7:18-26). 3) 이생의 자랑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교만(pride)입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를 가진 것들로, 잘하는 것들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것에 둡니다. 주님을 자랑하고 살아야 할텐데, 주님이 주신 것들이 마치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자랑합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은 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좇아 즉 사탄 마귀로부터 좇아온 것이기에 세상을 사랑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안되는 세번째 이유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7절)고 하였듯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정욕은 다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면 다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그런 것들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영혼은 영원하기에 영원한 것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 영원히 거한다고 하였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하기에 성령 하나님으로 행한 것만 영원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기에 그 말씀을 따라 행한 것만 영원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그렇게 살 때에 만족을,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사실 죄사함을 받은 것이나, 아버지를 아는 것이나, 악한 자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나, 창조주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선물)입니다. 우리의 영적 수준이 어디에 있든지 그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아이 수준이라면 청년의 수준으로 자라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또한 청년의 수준이라면 아비의 수준으로 자라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사탄 마귀의 영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말씀을, 계획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 필요한 은혜가 아닙니까?

무엇보다 세상을,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세상으로 좇아온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잠시 후에 다 사라집니다. 사탄 마귀의 영은 우리를 늘 미혹합니다. 유혹합니다.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의 심령이 더욱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냥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지 마시고, 대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려고 하십시오.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십시오. 늘 주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알아 행하고 사십시오. 그러면 더욱 자라서 청년의 기개로, 아비의 지혜로 살게 됩니다. 이런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전에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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