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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5-01-31 (월) 10:2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28    
[1/30/05] 서로 받아주고 격려하는 모임
서로 받아주고 격려하는 모임 (롬 15:7; 히 10:24-25)
1세기의 로마 제국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한 후, 전 세계에 안정적인 정치적 평화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인 평화를 선포된 것과 상관없이 로마인들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해 하며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로마인들에게 참된 소망은 초대교회, 즉 가정교회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게 전도에 더욱 힘쓸 것을 권면하면서, 교회가 더 이방인들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저는 지난 몇 주일 동안 계속하여 우리 구역 교회(모임)가 공동체로서 어떤 특성을 지녀야 하는지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참된 교제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모임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서로 용서하는 모임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또 하나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 실천 강령을 함께 읽은 성경 두 곳의 말씀을 중심으로 나누기 원합니다.
로마서 15장 1절부터 6절까지의 오늘 본문 문맥을 살펴보면 어찌하든지 이웃을, 이방인을 기쁘게 하며 덕을 세우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고 인내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는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절) 하십니다.
우리가 자라온 배경이 다르고, 생김새와 성격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심지어 신앙의 색깔이 조금 달라도 서로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연약한 죄인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하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마음에 드는 그 무엇이 있어서 받아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전혀 모르시는 분이 죄로 가득찬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안다면,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조건 없이 받아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모습이 있어서, 예쁜 데가 있어서 받아주는 것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일단 수용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회개하면 받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회개하기 전에 사랑하며 받아주고 나서, 회개하도록 도우십시오. 사실 우리의 회개도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까? 나 같은 죄인이 이 모습 이대로 십자가 앞에 나아와 예수를 구세주로, 주님으로 믿고 시인하였더니,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받아 주시고 용납해 주셨습니다. 그 큰 사랑을 깨닫고 나서, 내 죄가 얼마나 많고 큰지 생각하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마땅히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구역원들을, 성도들을 주님처럼 사랑으로 받아주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려면 그들의 연약함이 눈에 보일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도 사도 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함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즉 이웃의 약함을 우리가 담당해야 한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 이웃의 연약함을 발견하였을 때 ‘저 사람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 하지 말고, ‘그래서 저 사람 곁에 내가 필요하구나’ 하고 마음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실망이 되는 부분이 보이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와 결혼하게 하셨구나, 나로 그 부분을 도와서 조금 낫게 하려고 나와 만나게 하셨구나’ 라고 생각을 하여야 그 결혼이, 그 가정이 무언가 되는 가정, 축복의 가정이 아닙니까? 그것이 부부사이의 행복을 가꾸는 본질이 아닙니까?
실제로 건강한 가족은, 공동체는 상처주지 않는 관계가 아니라, 상처까지 끌어 않을 수 있는 은혜를 소유한 모임입니다. 성도들 사이에도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그의 곁에서 그의 조력자가 되어 섬김으로써 그를 유익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한다고 하십니다(2절). 그런데 이웃을 기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희생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늘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사는 연습을, 훈련을 해야 합니다(롬 6:10-11). 이것이 이웃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연습입니다. 그래야 비로서 우리 공동체는 서로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는 공동체가 되어갈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우리의 이웃을 조건 없이 받으려면, 몇 개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웃의 연약함을 볼 때에 제일 먼저 우리가 쉽게 보이는 반응은 그 사람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에 필요한 자세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며, 큰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내 생각을 접고 본질적인 것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비본질적인 것에, 사소한 것에, 인간의 교만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에 빠져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모이는지 그 목적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이름을 위하여, 그 의와 나라를 위하여 모이는 공동체라면,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어떻게 말씀을 더 잘 배우고 순종할 것인가, 어떻게 이웃을 더 사랑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 내 입맛, 내 기호대로 신앙생활하지 않고, 남을 위한, 이웃을 위한 삶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본질적인 것에 대하여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하여서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일에 사랑으로”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보다 적극적으로 이웃을 받아주는 자세가 바로 격려입니다. 그저 소극적으로 마지못해 받아주는 것은 참된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더더욱 우리 모두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크고 작은 문제들로 힘들어 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이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고난의 여정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힘들고 어려운 인생살이에서 “서로 돌아보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고난과 핍박에 직면해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종류는 달라도 1세기 때보다 훨씬 복잡하고 타락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더욱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서로 받아주고 격려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자주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격려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규칙적인 모임이 필요합니다. 소그룹, 구역 모임이 그래서 더욱 중요합니다. 주일 예배를 통하여 이런 개인적인 격려를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무서운 핍박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비밀은 규칙적인 만남이었습니다. 날마다 모였던 가정 교회였습니다. 지하 처소교회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자꾸 모이지 말자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하지 말고,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더욱 자주 만남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임에서 어떤 내용의 격려들이 있어야 할까요? 무슨 말로 격려해야 할까요? 때로는 격려하기 모인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있습니다. 사탄 마귀가 하는 일이지요. 어쩌면 그래서 모이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큰 자동차 사고가 난 후에 더 이상 운전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일수록 다시 핸들을 잡아야 합니다. 정신적인 상처, 심리적인 상처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분은 앞으로 다시는 운전을 할 수 없게 되고, 그의 삶은 너무나 불편해질 것이고, 많은 유익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임에서 어느 분의 실수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교제를 더 이상 못하게 되며, 많은 영적인 유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사람 자신의 손해입니다. 그래서 모임의 지도자는 기도하면서 지혜롭게 그런 분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임을 생산적으로 이끌어 가는 격려의 모임이 되려면 어떤 내용의 대화를 나눌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무슨 대화를 주로 나누어야 할까요? 정치이야기? 사업이야기? 자녀의 장래이야기? 물론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모임의 주제가 되면 안됩니다. 우리의 모임은 단순한 사람과의 만남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 전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모임에 적합한 주제는 세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2-25절을 잘 살펴보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 입니다. 이 세가지야 말로 이웃을 격려할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22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에 믿음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23절에서는 소망이 없이는 우리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기에 소망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사랑이 없는 모임은 전혀 의미가 없기에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일 때마다 믿음을, 소망을, 사랑을 말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르다보면 어린 시절에 몇 가지 중요한 좋은 습관을 길러 주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가 깨닫게 됩니다. 공부하는 습관, 교회에 성경공부하러 가는 습관, QT하는 습관, 절약하는 습관, 이웃을 섬기는 습관 등등 말입니다. 솔직히 이런 것들만 제대로 해줘도 자녀 교육은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왜 힘이 듭니까? 문제는 자녀들이 안 좋은 습관부터 먼저 배운다는 것입니다. 공부 안하고 장난하는 습관, 성경공부하러 가지 않으려는 습관, QT 안 하는 습관, 낭비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습관 등을 자연스럽게 너무 쉽게 배우지 않습니까?
신앙생활 할 때에도 우리는 안 좋은 신앙습관을 가진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누구와 신앙생활을 함께 하느냐가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역장님들의 역할이 너무 중요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이 너무 중요합니다. 본문 2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이기를 싫어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본을 보이는 분들을 바라보고 따라야 합니다. 아니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그 분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무슨 말을 하고 사셨는지 잘 보셔야 합니다. 복음서를 자주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실로 위대한 격려자였습니다. 특히 고난 받고, 버림 받는 자들의 친구였습니다. 아파하는 자들을 아시고 치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위대한 일들을 감당하게 된 것이 그의 인생에서 바나바라고 하는 격려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었을 때에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믿어준 단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청년 바울을 믿어주고 ‘함께 일하자’고 하면서 격려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침내 세계 선교의 지도력을 그에게 위임하고 조용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그야말로 이름처럼 ‘격려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바나바가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나중에 그를 따르던 디모데와 같은 많은 동역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격려를 바나바로부터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격려를 받아본 사람이 격려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구역 모임이, 교회가 이웃을 믿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랑의 모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 두 군데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 공동체가 참된 사랑의 공동체가 되려면 외적인 어떤 모습에도 관계없이 이웃을 받아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큰 그림을 보며 본질적인 것에, 모인 궁극적인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앞을 내다보시고 우리의 모습에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저 소극적으로 마지못해 받아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격려해 주는 모임이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려면 자주 모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주제로 삶을 나눔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는 생산적인 모임으로 만들고, 좋은 습관을 배우고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하고 이러한 자세로 모임을 갖고 서로 받아주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나타내기를 축원합니다. 서로 받아주고, 격려하는 구역,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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