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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12-09 (월) 08:1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91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2-18)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다큐멘터리나 유튜브를 통해서라도 보면 애벌레(caterpillar)가 나비(butterfly)로 변화되는 과정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야말로 변형(transformation)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나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애벌레 시대로 산다면, 애벌레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애를 쓴다면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것을 추구하고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헌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새 옷을 입혀 주셨는데도 자꾸 헌 옷을 주어 입으려고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새 언약의 영광은 옛 언약에 비하여 훨씬 더 큰 영광이었습니다. 복음은 율법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율법처럼 없어지는 영광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12-13절)고 하였습니다. 복음의 영광은 율법의 영광처럼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소망이 확실하여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는 것이지, 율법처럼 하나님의 등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왜 얼굴에 수건을 썼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작은 영광을 보고도 그 얼굴이 너무 빛나서 그 백성들이 가까이 하려면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출 34:29-30). 문제는 이 율법의 영광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장차 없어질 것이었습니다. 더 큰 영광의 진리가 나타나면 그 빛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모세처럼 그 율법의 영광을 의미하는 수건을 쓴 것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더 큰 영광의 빛을, 복음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율법의 영광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인이며,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나타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병은 마음 속에 있습니다. 병균이 바로 죄성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고, 자기 욕망대로 살려고 하는데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병균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다른 것 가지고 불평합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합니다. 이 죄가 치료되지 않으면 그 인생은 하나님 앞에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나중에 영원토록 고통을, 아픔을 겪게 됩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율법주의자들이 있어서 자꾸 그 모세의 영광인 수건을 붙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14절)고 하였습니다.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완고하여 메시아의 예언에 대한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도 더 큰 영광의 빛, 메시아를 사모하며 죄에 대하여 애통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를 구하지 않고 수건을 벗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과 편견에 치우쳐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종종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다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외에 많은 규례들을 정해 놓고 그것들을 지켜야 의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처럼 자기 열심으로, 자기의 의로 구원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고린도교인들에게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고, 믿어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수건을 벗어야 했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고, 구약의 예언이 성취가 되어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죄성을, 병을 치료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율법을, 종교적인 예식을 다 지켜야만 치료가 된다고 고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15절)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완전히 거룩해지지는 않습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 우리의 몸이 영광의 몸으로 바뀔 때 완전히 주님과 같은 거룩한 몸이 됩니다. 하지만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으며,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죄를 이길 능력을 주셨습니다. 죄와 싸우면서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오늘날도 많은 교인들이 믿는다고 하면서 수건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고, 오직 내 안에 주님께서, 성령님께서 할 수 있음을 믿고 나는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교만의 수건을, 위선의 수건을 벗어야 합니다. 망집, 망할 고집을 내던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임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같은 예배를 드리며, 동일한 설교를 들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전혀 그 영광의 빛을 보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합니다. 이유는 한 사람은 복음으로 죄 용서를 받은 상태에서 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죄를 그냥 가슴에 품은 채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수건을 벗고 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그냥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의지하며, 자기의 의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 자기 힘으로 병을 고치려 하고,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직도 완고한 고집으로 수건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수건을 쓴 채로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려면 수건을 벗고 자신의 병을 다 드러내는 발가벗은 상태로 나아가면서 우리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체험하게 될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16절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서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나는 도둑질도, 악한 행동도, 간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나는 정기적으로 금식을 하면서 기도도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라고 했으며, 다른 사람은 서서 눈을 들어 하늘도 쳐다 보지 못하며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나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죄로 가득찬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했을 때 누가 정말 의로운 자며, 하나님께서 누구를 높여주겠느냐고 하였습니다(눅 18:10-14). 답은 명백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그 사람이 죄인이 아닙니까? 그에게도 죄성이라는 병균이 있어서 병자,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인 인간이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죄를 용서하시고자 그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는데, 이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종교생활과 율법을 지키는 자기의 의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아니 이미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도로 옛 사람으로, 수건을 쓰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이미 자유하게 하셨는데 아직도 감옥에 갇혀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6절하)고 하였습니다. 영의 복음은 우리를 완전히 자유하게 합니다. 죄의 권세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종교생활로부터, 외식적인 삶으로부터, 미신으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17절)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입니다(요 14:17). 또한 우리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4:6).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성령님이 내주하는 성도들이 자유함을 누리고 산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합니다. 만왕의 왕 앞에서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만왕의 왕과 교제하고, 울고, 웃고 하면서 자유롭게 행동할 자격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예배가 바로 이런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 존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는 수건을 썼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수건을 벗고 40일 주야로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영광의 교제를 나눈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교제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죄의 권세가 우리를 막을 것이며, 무슨 율법이 우리를 막겠습니까? 하물며 미신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아무리 어렵고 답답한 일을,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잠깐 있는 아픔이, 슬픔이 그 영광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이 주는 어떤 기쁨조차도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것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성령님께서 깨우쳐 주셔서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십자가의 보혈을 바라보며 다시 씻음을 받는 것입니다. 결코 수건을 다시 쓰는 것은 아닙니다. 수건을 쓴다고 지은 죄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진솔하게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고백하며, 죄에서 돌이키면 또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바울은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18절)!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수건을 벗었습니다. 믿기 전 불신앙의 교만과 위선과 편견과 망집을 다 벗어 버렸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시 수건을 쓰려고 하지 마십시오. 담대히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복음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입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거울로 얼굴을 보는 것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물론 당시의 거울은 구리로 만든 것이라 오늘의 거울처럼 뚜렷하고 명확한 영광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건은 내어 던져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의 심령이 감동, 감화를 받을 때 영광을 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영광을 봅니다.
   18절에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는 동사가 현재 수동형으로 쓰였습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뜻입니다. 그리고 수동형이니까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즉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으로 인침을 받을 때 수건을 벗고 새로운 새 사람이 된 후에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주님의 형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일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 되면서 점점 주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완전히 부활하신 주님과 똑 같은 몸으로 입게 되는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고, 우리의 삶도 영광스러워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아직도 수건을 쓰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복음을 깨닫고 믿어 성령을 받으셨다면 이미 변화를 받았습니다. 더 이상 애벌레가 아닙니다.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져서 주님을 더욱 닮아가야 합니다. 율법이 중요합니다. 예식이나 의식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더 영광스러운 것은 복음입니다. 진리의 성령으로 주어진 자유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막 살아도 되는 방종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가 뵐 수 있는, 만날 수 있는 영광의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영광을 가장 잘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때가 이렇게 수건을 다 벗은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때입니다. 예배할 때입니다.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며 영광을 체험한 후에 세상에 나아가서 죄와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믿고we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예배 때에 승전고의 찬양을 드리고, 전리품을 주께 드리는 삶이야말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제발 과거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옛 삶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헌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하지 마십시오.다시 교만해지거나, 외식적이 되거나, 고집을 부리지 마십시오. 내 자신의 의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다 내려 놓으십시오. 자주 자신을 쳐서 성령님께 복종시키십시오. 내주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영광을 붙드십시오. 그 하나님의 얼굴을 쳐다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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