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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6-08-12 (토) 04:5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577    
[3/26/06] 어떤 죽음을
어떤 죽음을 . . . (사도행전 7:54-60)

미국 사람들은 죽음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장례식 가운데 맨 처음 우리 말로는 입관예배라고도 할 수 있는 Viewing Service (관을 열어놓고 드리는 예배) 라는 절차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한국에서는 염이라는 것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장의사가 죽은 시신이 금방 부패하지 않도록 약품으로 처리하고, 고인이 평소에 좋아하던 옷을 입히고, 얼굴 화장을 하고 관속에 눕혀 둡니다. 그러면 문상객들이 와서 누워 잠자는 듯한 고인 앞에 와서 옛 생각을 하며 그리워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스데반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죽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 때에 멋지게, 훌륭하게 산 사람은 멋진 죽음, 훌륭한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오랫동안 기억합니다. 그래서 스데반과 같이 순교자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비굴한 죽음이나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 잘 죽었다’는 욕을 먹기도 합니다. 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몇 사람 있는데, 사울 왕은 비굴하게 살다가 끝내 자살하였고, 가롯 유다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에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정말 어떤 사람의 죽음이 아무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하거나 안타까움을 주지 못하는 죽음, 아니 욕 먹는 죽음은 그야말로 인생을 헛산, 낭비한 죽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죽음을 맞이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죽느냐’는 지금 ‘어떻게 사느냐’와 관계 있습니다. 지금 떳떳하지 못하게 비굴하게, 비참하게,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면 죽을 때도 그렇게 죽습니다. 그러나 지금 멋지게, 훌륭하게, 담대하게, 주를 위하여, 남을 위하여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산다면 죽을 때도 그렇게 죽음으로 남은 많은 사람에게 아쉬움을, 안타까움을 주면서 그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습니다.

거짓 고소를 당한 스데반이 자신이 전한 복음을 변호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아브라함과 요셉 이야기를 하고, 모세와 여호수아의 성막, 다윗과 솔로몬의 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2-50절). 그리고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그 조상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지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항상 성령을 거스려 행하기에 예수 그리스도도 죽이지 않았느냐고 외치자(51-53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54절). 즉,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미움이 솟구쳐 이를 갈면서 증오의 불길을 내어 뿜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은 축복입니다. 아무런 감동이나 도전을 받지 못한다면 슬픈 일입니다. 들은 말씀이 자신을 향한 책망이요, 충고와 도전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받아 들인 것이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찔림이 있을 때에는 회개하고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한번은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듣는 이들이 마음이 찔려 회개하고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3000명이나 되었었습니다(행 2:38-41).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양심을 허락해주신 까닭은 양심에 걸리는 것들이 있으면 언제나 거절하라고 한 것입니다. 자꾸 더러운 것이 들어오려고 하면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을 더러운 것으로 가득채워 놓은 강퍅한 양심, 화인 맞은 양심은 죄에 대하여 반응이 없고 악에 대하여서도 걸림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이 분노하여 이를 갈고 죽이려는 순간 스데반은 오히려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리고 다시 외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 죽음을 눈 앞에 두고도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지금 마음에 찔림과 분노로 치를 떨고 있지만, 대조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오히려 담대하며 그 마음에 사랑과 용서가 가득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그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58절) 하였습니다. 저들이 큰 소리를 지른 것은 자신 속의 두려움을 이기려는 것이요, 또한 다른 사람들을 충동하는 것입니다. 큰 소리를 내는 사람 중에는 자기 마음의 조용한 음성을 듣기가 겁이 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귀를 막은 것은 스데반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며 또한 자신들의 악한 소리도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치 굶주린 사자들이 먹이를 덮치듯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가 내치고는 돌로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불법입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로마 제국의 법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감정이 악하여졌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서 죽이는 형벌은 제일 먼저 증인 두 명이 죄인의 심장을 향하여 돌을 던지면 이어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죽을 때까지 돌로 쳐 돌무덤을 만드는 것입니다(신 17:6). 확실히 죽였다는 증거로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둡니다. 이 죽음의 장면을 쳐다보고 있던 사울은 이 때까지도 유대 종교인으로 열심이 특별하였으므로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모독한 자라면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배워왔기에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데반은 그렇게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실 때에 부르짖으셨던 것처럼 첫째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절하)! 영원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한 것입니다. 둘째로, 그를 무섭게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절)! 선한 그리스도인을 죽이는 것은 죄가 분명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라도 진정으로 예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드린 후에 그는 고요히 잠자게 되었습니다(60절하). 무릎을 꿇은 채로 하나님께 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잠시 눈을 감고 자는 것이요, 머지 않아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깨는 것입니다. 영어의 공동묘지를 뜻하는 ‘cemetery’ 가 헬라어 원어의 ‘잠’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넘겨 짚고 지나가야 할 것은 사울이라는 청년입니다. 유대 종교에 열심이 있는 자였으나 그 자리에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면서도 두려움이 없이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음을 맞는 스데반을 보면서, 아마 사울은 스스로 의문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과연 스데반의 설교가 사실인가? 그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인가? 그는 어떻게 그 고통이 극에 달하는 시간에도 편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그날부터 사울은 고민에 빠졌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9장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어 바울로 변하게 되는 데, 그가 회심하게 된 데에는 스데반의 죽음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처럼 첫 순교자인 스데반의 죽음도 위대한 죽음이요, 멋진 죽음이요, 후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죽음이기에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죽음 자체만 보면 십자가 죽음이나 돌에 맞아 죽는 것이나 너무 비참한 죽음 같지만, 2000년 교회 역사는 그 죽음을 아름답게 기리고 있습니다. 왜? 어떠한 죽음이었기에?
첫째, 스데반의 죽음은 복음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즉 그의 삶은 복음을 위한 삶이었고, 예수님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무엇을 위하여 우리의 땀과 피를 쏟겠습니까? 무엇을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하여 죽겠습니까? 우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는 것도 위대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그들을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기립니다. 또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며 죽는 것도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빛이 되시며,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산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위대한 삶과 죽음입니다. 잠간이면 없어질 일시적인 것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 축복의 삶이요, 위대한 삶입니다. 스데반처럼 복음을 위하여 죽을 수 있다면 그 죽음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안타까운 죽음이요, 위대한 죽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죽음입니다.
둘째, 스데반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기에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확실히 믿었습니다(요 11:25-26). 비록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지언정 영적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을, 그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길 수가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죽음은 주님께서 맡아주십니다. 성도들에게는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처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잠시 자다가 깰 것입니다. 할렐루야!
셋째, 스데반의 죽음은 용서와 사랑으로 마무리하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들조차 용서하고, 그들을 위하여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평안하게 하나님께로 갔습니까?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쉼이, 안식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안이 있을 뿐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는데도 마음이 평안하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강퍅한,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입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다가 자신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 넘긴 비정한 형제들까지 용서하고 사랑한 요셉은 정말 예수님과 다름이 없는, 스데반과 다름이 없는 넓은 마음으로 성령의 음성을 거스리지 않고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축복을 받아서 애굽의 총리로, 70여명이 넘는 온 가족을 책임지는 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애굽에서 성취하는 자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죽음으로 인생을 마무리 지으시렵니까? 여러분의 자손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아, 여러분의 주검을 앞에 놓고 서로 조가를 부르겠노라고, 조사를 하겠노라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길이 주위 사람들에게 남을만한 죽음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저 그렇게 살다가 여러분의 주검 앞에 그저 자식들만, 몇몇 친지들만 울먹거리며 안타까이 여기는 죽음을 맞이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슬퍼하는 척해도 속으로 그 사람 참 잘 죽었다 시원해 할 그런 죽음을 맞이하겠습니까?
결단하셔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결심하십시오.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름을 남기겠습니까? 얼마나 위대한 죽음이었으면 성경에까지 기록된 이름, 스데반이었습니까? 사실 스데반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라틴어 Stephanos 는 왕관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 인생이 얼마나 무상합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스데반을 안수하여 지도자로 임명하였을 때(6장), 성도들은 그가 많은 일을 한 후에 주께서 부르실 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아래 그의 삶은 잠시 후에 끝났습니다. 하루 하루가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것을 귀하게 사용하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 부르셔도 찬송하며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위하여 사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사십시오. 그 고귀한 피로 한 형제 자매된 지체들을 위하여 사십시오. 남을 위하여 사십시오. 그리고 천국을 소망하십시오. 이 땅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죽은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잠시 자는 것입니다. 반드시 깨어날 날이 옵니다. 그리고, 용서하며 사십시오. 사랑하며 사십시오. 나에게 상처주고 못되게 하는 자들을 용서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 3:15).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11)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까지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까지 용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본을 받아 닮아가려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잊지 마십시오(마 5:44). 사랑하며 사십시오. 다 여러분의 이 땅에서 뿌린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으로 많이 뿌려 놓으신 분들은 죽어서도 그 사랑을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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