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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6-08-12 (토) 05:1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683    
[7/23/06] 진실로 믿으면
진실로 믿으면 (사도행전 9:19b-25)
대부분의 여러분들이 경험하였을 줄로 믿습니다만, 예수를 믿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라면 무언가 삶에 달라지는 면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믿기는 믿는데 전혀 삶에 변화가 없다고 한다면 잘못 믿는 것이든지, 아니면 가짜 믿음입니다. 성경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믿음의 조상들 뿐 아니라, 우리 먼저 간 신앙 선배들을 비롯하여, 지금도 성도들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일들을 보게 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만 보더라도, 갈릴리 해변의 무식하고 성질이 불 같던 베드로도, 남편을 다섯이나 있던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도, 악명 높던 세리로 백성들의 원망과 미움의 대상이 되었던 삭개오도, 귀신들렸던 사람도, 오랜 혈루병으로 죽음 직전에 놓였던 여자도, 거지로 소경으로 비참하게 살던 바디매오라는 청년도 변하여 복음의 증인들이 된 것을 아십시까?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어떻게 변하셨습니까?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변화를 보고 놀랐거나, 놀라고 있습니까?

그런데, 많은 변화들 가운데 꼭 있어야 할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멀어져 다메섹에 있다가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다시 눈이 떠지고,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행 9:17). 그리고 나서 다메섹에 있는 주의 제자들과 며칠 교제한 후에 즉시 유대인 회당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전도하기 시작합니다(20절, 22절). 마치 그 유명한 사도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8) 라는 고백과도 동일하게 말입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가 만연한 가운데 하나님(God), 즉 신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분위기 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고, 전해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기록들에 의하면 예수님을 만나서 그의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하거나 죄 사함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 신의 아들로서 인간이었다’ 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곧 그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던 유대주의자들이 예수님 스스로 혹은 그의 제자들이 그런 고백을 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죄라고 하면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아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죽음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또한 아무도 그의 구원에로의 초대에 거절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 그들을 긴장하게 한 것입니다. 그의 부활도 믿어야 하고, 또한 그가 어느 날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는 예언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분명히 예수를 믿으면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신비한 체험도 복음의 핵심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외아들, 독생자요 그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후에 믿음이 생기자 이 진리를 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다 놀라면서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 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21절)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입을 열어 그 신앙고백을 하십시오. 여러분의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삼위의 하나님 중 한 분이십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22절에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주의 제자들과 교제를 나누고, 그들로부터 기도의 후원을 받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믿기 전의 유대인 동료들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헬라어), 즉 메시아(히브리어)임을 강하게 증거하며 증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보내신다고 약속하신 분입니다. 그 백성들을 구속하실 분을 뜻합니다. 구약 시대에 기름부음을 받아 세웠던 왕, 제사장, 선지자들의 대표로 택한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자를 말합니다. 바로 베들레헴에서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성령으로 태어나고, 나사렛에서 자라신 예수님이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자신들과 함께 신자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유대인들에게 이런 고백을 하면서 증거하니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굴복했다고 합니다. 여기 ‘굴복했다’는 뜻은 ‘혼동시키다, 좌절시키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사울의 신앙고백을 들은 그들 사이에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정말 예수가 메시아인지 자기들끼리 논쟁하는 상태에 빠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되어 설득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그를 원수로 여기기도 한 것입니다. 워낙 확신에 찬 사울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십니까?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내 삶의 주인이, 주가 되신 예수님이십니다’라고 하나님께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믿는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주위에 믿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정말 예수님은 그리스도, 구세주이십니다’라고 말하십니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혼동이 될 것입니다. 미쳤다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자신도 예수님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그리스도, 구세주이십니다. 주(Lord)이십니다.

그리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반드시 있는 변화 중 하나는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오는 핍박을 참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렇게 담대하게 신앙고백을 하며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를 합니다(23절). 만나게 되면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게 됩니다(24절).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울도 그렇게 믿는 자들을 잡아 넘기며 핍박했었는데, 이제는 거꾸로 되었습니다. 핍박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16절에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앞으로 해를 받을 사울이라고 예언하신대로 말입니다.
오늘날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진실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사탄 마귀가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핍박합니다. 가족을 사용하여, 직장을 통하여, 사람들과 환경을 사용하여 못살게 굽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 때로 손해나 피해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그 고난을 잘 참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믿고 만사 형통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시는 분은 없습니까? 예수 믿어서 자식들도 복을 받고, 병도 나아 건강하고, 내 사업도 좀 잘 되고, 직장에서도 승진이 되고 하여 이 세상에서 좋은 차, 좋은 집에서 희희락락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시는 것은 아닙니까?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축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필요한 것을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하였으며,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삶의 만사형통을 위하여 교회를 나오고 예수를 믿는다면 대단히 잘못된 믿음입니다.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는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의미를, 그 은혜를 아직 잘 모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직 잘 깨닫지 못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들은 잠시 잠간이면 다 없어질 것들이지만 영원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5-16)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주를 위해 손해도 보고, 오해도 받고, 핍박도 받으며,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히려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안타까운 것은 요즈음 성도들은 고난을 당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세상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 때문에 오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으셔야 합니다. 믿지 않으시면 심판이 있습니다’라는 말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살면 따돌림을 받거나 피해를 입을 경우라고 생각이 되면 입 다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 나중에 주님께서 어쩌면 여러분을 모른다 하실지 모릅니다. 뭇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주로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여러분을 인정하지 않으실 지 모릅니다.

한편, 어려운 고난이 있어도, 핍박이 있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전하고 사시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동지들이 있습니다.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울도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25절) 하였습니다. 함께 있던 그의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사울을 잡아 죽이려 성문들을 지켜 서있는 것을 알아 내고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피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아직은 그들과 직접 대면할 때가 아니었기에 피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을 보면 핍박하는 그들과 직접 대면하여 고통을 당한 적이 많습니다. 나중에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분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분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하-27)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자리를 피하는 데에 그의 제자들이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도 바른 신앙고백으로 예수님을 전하고 사는 우리에게 때때로 어려움이 있어도 주위에 동지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혈육보다 더 진하고 가까운 주님의 제자들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좁은 길을 동행해 주는 성도들이 주위에 있을 때에,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삶을 나누며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는 성도들이 주위에 있는 것을 알고 있을 때에 힘들어도 감당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성도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많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진실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 구세주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신앙고백을 하십시오.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선언하십시오. 고통스러울 지 모릅니다. 핍박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무서워 말하지 않는다면 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이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그 눈물을 씻겨주시며 위로해 주시고, 힘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진실한 성도들을 사용해서라도 말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 주로 고백하며, 선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막 탄생할 때에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하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믿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믿으십시오. 2000여년 전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오늘도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는 구세주(Savior)이시며, 주(Lord)이십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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