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017,013
오늘방문 : 33
어제방문 : 2757
전체글등록 : 3,841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5-01-31 (월) 10:2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719    
[1/23/05] 서로 용서하는 모임
서로 용서하는 모임 (에베소서 4:32-5:2)
미국 인디안 중에 Quechua 족이 있습니다. 이 Quechua 족의 언어에는 성경에 나오는 ‘아가페’ 사랑과 상응하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Quechua 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아가페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궁리하다가 20자가 넘는 긴 낱말을 새로 만들어 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단어가 ‘kuyapayariykusmaykichikpay’ 란 단어인데, 이것은 Quechua 어로 ‘큰 긍휼을 몸으로 드러낸다’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큰 긍휼, 자비를 손수 몸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 아가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 구역 교회(모임)은 서로 사랑하는 모임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였다면, 아니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의지적으로 결단을 내리시면 성령님께서 도우셔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5)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참된 사랑의 모임들이 되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강령 중 하나가 바로 용서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4장 말씀에 의하면 에베소교회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하던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거짓을 버려라, 분을 내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엡 4:26-31).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는 이런 교인들이 전혀 없을까요?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 안에도 쉽게 분을 내고, 거짓말을 하고, 더러운 말을 하고, 도적질하는 교인이 분명히 존재하는 데도, 과연 교회가 필요한가 라는 의문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아니 이런 사람들의 궁극적인 변화를 위해서라도 더더욱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모두 한 순간에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믿음으로 견디어 내야 합니다. 실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했지만, 우리의 변화도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실수도 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가 옛 사람을 계속 벗어 버리며 동시에 새 사람을 계속 입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엡 4:22-24). 그런데 그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 교회가 궁극적인 변화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그 변화의 도상에서 드러나는 서로의 모습을 대하려면, 제일 필요한 것이 ‘서로를 향한 용서’ 입니다.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의 결론을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2절)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용서가 제일 필요한 곳이 바로 구역 교회(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체 교회에서야 별로 부딪힐 일이 없습니다만, 소그룹으로 모이는 구역 모임에서는 자신들의 부족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멀리 떨어져 서로 거리를 두고 살 때에는 사랑할 필요도, 용서할 거리도 없습니다. 그러한 교제는 참된 성도의 교제가 아니며, 교회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그룹 구역 모임에서 서로의 삶을 열고 참된 교제를 할 때에는 작은 상처에서부터 큰 상처까지 피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 곳이 어디일까요? 가정입니다. 부부사이에서, 부자관계에서, 형제들 사이에서 수 없이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그렇다고 가정이 필요없다고, 없애자고 할 것입니까? 가정을 뛰쳐 나갈 것입니까? 뛰쳐 나간다고 그 가족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이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과 용서를 배우는 곳입니다. 영적인 가정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가정은 용서가 넉넉한 가정입니다. 가족들이 서로를 향한 비난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런 가정은 행복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교회는 용서가 넉넉한 교회입니다. 용서가 넉넉한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역 모임에서, 교회에서 어떻게 서로를 향하여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본문 32절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서로 인자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는 ‘인자하게 대하라’고 번역했지만, 대부분의 영어번역에는 ‘친절히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더라도 우선 의지적으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으로 시작하라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의 생활 양식을 증언하는 어느 문서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친절한 사람’이라는 말로 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서로에게 친절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행하는 것이 서로 친절히 대하는 것입니까? 이 단어가 가진 본래의 의미는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일에 관계없이 그에 대하여 올바른 말을 하고 올바른 태도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주님처럼 말하고, 주님처럼 대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서로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열정(compassion)을 가지고 대하라는 말입니다. 그도 연약한 인간임을,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품으셨던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입니다. 다른 영어번역에는 ‘이해하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원래 의도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유는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려면 그를 먼저 이해하려고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분통이 터지는 말이나 행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왜 그 사람이 그랬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이나 성장 과정을 살펴보십시오. 그를 둘러싼 삶의 여정에서 그가 받은 상처를 살펴 보십시오. 분하고 억울하지만 나에게 그렇게 대한 이유가 조금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나고 용서가 가능해 집니다.

셋째는,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받은 용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 묵상하며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계속 이어서 5장 1절에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가 서로 용서하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William A. Word 라는 사람은 “우리가 복수할 때에는 우리는 짐승과 같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에는 우리는 인간 같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할 때에는 우리는 하나님 같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 아닙니까? 짐승 같이 살기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잘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늘 복수의 마음을 품고 사십시오. 아니면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살기 원하십니까? 계속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죄를 지으십시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하는 진정한 제자로 살기 원하신다면 주님을 닮기 위하여 용서하시고 용납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아시고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를 용납하시며 용서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고귀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적인 존재, 가치있는 존재로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고자 한다면 내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든 미워하든 그런 나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내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 사람도 ‘하나님의 작품’ 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용서'의 말씀이 나올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빚진 종과 주인, 그 종에게 빚진 동관, 친구의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에게 조그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지 않으시면 얼마나 진노하실까 하는 생각들을 해 보십시요. 즉,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서로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을 때에 그의 조수가 서두르다가 그만 그림에 페인트 몇 방울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크게 진노하여 젊은 조수에게 심한 말을 퍼붓고, 그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혼자 남아 그림을 계속 그리려는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지지 않더랍니다. 결국 다빈치는 붓을 집어던지고 밖으로 나가 그 조수에게 사과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해 주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하마. 다시 들어가자. 나도, 너도 모두 잘못을 저지른 것이야. 사실 화를 낸 내가 페인트 몇 방울을 떨어뜨린 너보다 더 큰 잘못을 범한 것이지’ 하면서 조수를 다시 데려와 함께 일하기 시작하고 난 후에야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악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나는 분노는 분노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영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힙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것이구요. 우리도 우리의 가족이나, 이웃 형제 자매가 잘못하였을 때에 그만 화를 내고 못할 말을 한 후에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처럼 용서하면 더 큰 은혜가 넘치는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웃을 바라보면서 용서하고 용납한다면 우리 교회가, 우리 구역 모임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용서한다면 어떻게 달라질까요? 오늘 본문 5장 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면 우리 이웃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구역 교회가, 우리 경향가든교회가 참으로 사랑하면서 서로 용서하는 공동체가 될 때에 이 사회를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비전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대하면서, 서로 불쌍히 여기고, 나 자신이 죄 용서함 받을 것을 생각하며 서로 용서하는 그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399 주일설교 믿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요 12:37-50) 한태일 목사 2011-08-02 1563
398 주일설교 빛의 아들들이 되었으니(요 12:27-36) 한태일 목사 2011-07-25 1633
397 주일설교 주님을 섬기려면(요12:17-26) 관리자 2011-07-23 1681
396 주일설교 잘못된 믿음(요한복음 12:12-16) 관리자 2011-07-23 1554
395 수요설교 마귀의 능력을 초월하시는 예수님(마 8:28-34) 한태일 목사 2011-07-07 1642
394 주일설교 은혜를 받았다면(요 12:1-11) 한태일 목사 2011-07-07 1573
393 주일설교 부활과 생명(4)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으나- (요 11:45-57) 한태일 목사 2011-06-27 1657
392 수요설교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 모범(신 12:1-7) 한태일 목사 2011-06-23 1681
391 주일설교 아버지들에게 감사(잠 13:1) 한태일 목사 2011-06-20 1752
390 주일설교 부활과 생명(3) -돌을 옮겨 놓으라- (요 11:38-44) 한태일 목사 2011-06-13 1590
389 수요설교 선택은 우리에게(신 11:18-25) 한태일 목사 2011-06-10 1600
388 주일설교 부활과 생명(2) - 말씀을 네가 믿느냐- (요 11:17-37) 한태일 목사 2011-06-06 1555
387 수요설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신 11:8-17) 한태일 목사 2011-06-02 1693
386 주일설교 부활과 생명(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요 11:1-16)- 한태일 목사 2011-05-30 1620
385 주일설교 주님의 참된 양들은(요 10:22-42) 한태일 목사 2011-05-23 1718
384 수요설교 믿는 자들의 자원(신 11:1-7) 한태일 목사 2011-05-19 1801
1,,,6162636465666768697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