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141,895
오늘방문 : 14456
어제방문 : 10789
전체글등록 : 3,867
오늘글등록 : 1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05-23 (월) 09:1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40    
주님의 참된 양들은(요 10:22-42)
신구약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기 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 부류는 자기 양이 아닌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정확하게 구별하고 계시며 여기에 절대로 실수가 없으십니다. 즉 어떤 사람에게는 ‘너는 내 양이라’고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너는 내 양이 아니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참 두렵고도 감사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의 뜻대로 아니라, 하나님의 뜻, 주권적인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 만세 전부터 이미 아시고 자기 양들을 선택하시고, 나중에 믿을 수 있도록 준비를 다 해 놓으셨다가 때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믿게 하셨다고 합니다(롬 8:29-30). 즉 우리가 주님의 양으로 선택 받았기 때문에 믿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죽을 때까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선택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선택 받은 주님의 참된 양들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라는 말씀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 두 부류가 확실히 구분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양들의 특징이 나옵니다. 내가 주님의 참된 양인지 어떻게 압니까?

오늘 본문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끝부분을 적고 있습니다. 3년 넘게 예수님께서는 온 유대와 갈릴리를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고, 거짓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으시며, 그의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면서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믿지를 않았습니다. 이유는 주님의 양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26절).
때는 22절에서 언급하였듯이 장막절 혹은 초막절(7:1-8:30)이 2개월 정도 지난 12월 겨울 수전절(the Feast of Dedication)이었습니다. 이 절기는 주전 170년 경에 당시 시리아 왕이었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8만 여명의 유대인들을 죽이고,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제단에다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를 가지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면서 일부러 성전을 더럽히고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5-6년 지나자 유대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유다 마카비우스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 혁명이 성공하여 다시금 성전을 청결하게 하고 새 번제단을 봉헌하였던 것을 기념하여, 그 이후로 매년 12월 중에 메노라(Menorah)라는 등을 켜고 8일 동안 축제를 벌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하누카(Hanukkah), 즉 봉헌이라는 명칭이 사용됩니다.
이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와 있던 유대인들이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23절).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 둘러싸고 묻습니다. 24절을 의역하면 ‘왜 우리 마음을 헷갈리게 하느냐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말하였고, 그 증거도 수없이 많이 보여주었지만 믿지를 않는다고 하십니다(25-26절). 이유는 주님 자신의 참된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복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를 잘 알고 계십니다. 사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서는 ‘너는 내 양이다’, 또 어떤 사람에 대하여는 ‘너는 내 양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십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그 사람 안에 믿음이 생겨 주님과 어떤 인격적인 관계가 일어났다면 모를 리가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서로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한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믿음은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데 하나님만 죽으라고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요, 내가 하나님을 짝사랑하면서 잘 믿어보려고 열심을 내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를 인격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과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가 성립이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참된 양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27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주님의 참된 양은 주님의 음성을 구별하여 알아 듣습니다(10:4-5). 그리고 따라갑니다. 이유는 주님에게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신뢰하니까요. 그래서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참된 양들은 단 한 순간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분일초도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며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평안을 주십니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저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음성 중에 주님의 음성만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참된 양이지요.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말씀을 듣지 못하니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방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마귀들은 필사적으로 양들이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애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끊고 다른 음성을 듣게 하면 양들을 다 잡을 수 있으니까요.
한편 주님의 양이 아닌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들끼리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양의 우리도 귀찮고, 양의 문도 성가신 것입니다. 오로지 목자만 좇아 간다는 것이 그렇게 바보스럽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아직 목자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저희를 알며”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로 잘 아시느냐 하면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지금 내 상태나 내 기질, 성격, 약점까지도 전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주님의 참된 양의 세 번째 특징은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영생은 영원히 보장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28-30절)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자기의 양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이기에 어느 누구도 그 생명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영원토록 안전하게 보장이 되어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생명’과 ‘영생’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했습니다. 즉 하나님에게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사는 생명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생명을 ‘생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른 아침에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육신의 생명을(약 4:14)-+ 영생에 비하면 ‘생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혹자는 말합니다.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는 것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안개처럼 잠깐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백세가 아닙니까? 수천억만 년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오래 살겠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모해야 할 생명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영화와 부귀를 다 누린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며 모든 명예를 다 누리며 욕심을 다 충족시키며 100세까지 산다 해도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을 놓쳐 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 영생이 아니라 영벌을 받게 되어 수천억 년을 고통 속에 후회하고 살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이 영생의 선물이 거저라서 그런지, 자기는 아직도 기회가 많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으신 분들 가운데서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진실로 한 번 믿음을 가진 사람은 좀 흔들릴 수는 있어도 영생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28-29절). 그런데 이 영생에 대한 확신,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흔들리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말씀을 나누어 보면 분명히 믿는 사람으로 주님의 양이 확실한 것 같은데 확신이 없으신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확신이 부족하다고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어도 확신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100% 완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1% 라도 의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셔야 할 것은 믿음이 있으면서도 의심이 일어난 것은 지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의지적인 마음의 문제입니다. 개혁주의자 요한 칼빈은 이 문제를 배를 가지고 비유했습니다. 눈 앞에 배가 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배를 의심할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있으니까요. 그런데 배를 탈 것이냐 말 것이냐는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배를 타면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나면 위험할 것도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는 것이 바로 의지적인 마음의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믿으면 영생을 주겠다. 하나님인 내가 주는 것이니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듣고 의지적으로 믿겠다고 마음의 결단을 내리면 의심이 물러갑니다. 이런 의지적인 결단이 부족하여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저 말씀을 붙들고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라고 했습니다(30절). 즉 예수님이 곧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1장부터 계속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격과 신격을 걸고 영생을 주겠다고 하시며, 끝까지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31절 이하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씀을 듣고 크게 진노하여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이라 하면서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동안 자신이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고 믿으라고 합니다(34-37절).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그 행한 일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임을 믿으라고 합니다(38절).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양이 아니었기에 결국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강 저편 세례 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에 주님께서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인정하고 믿게 됩니다(40-42절). 하나님께서 택하신 주님의 참된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보면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행 1:15)과 이 갈릴리 지역의 오백 여명 정도(고전 15:6, 마 28:7, 16)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랐던 참된 양들로 여겨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모두는 주님의 참된 양들입니까? 참된 양들의 특징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성을 듣고 신뢰함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누리며, 영원토록 안전 보장이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진리가 그대로 적용되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 받은 주님의 참된 양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410 주일설교 나의 평안을 주노라(요 14:25-31) 한태일 목사 2011-10-03 1603
409 주일설교 주님을 사랑한다면(요 14:15-24) 한태일 목사 2011-09-26 1586
408 수요설교 믿음의 시험(신 13:1-11) 한태일 목사 2011-09-23 1593
407 주일설교 더 큰 일도 하리라(요 14:12-14) 한태일 목사 2011-09-20 1697
406 주일설교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요 14:1-11) 한태일 목사 2011-09-12 1984
405 수요설교 세상에서 주의하여야 할 것들(신 12:8-19) 한태일 목사 2011-09-09 1543
404 주일설교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요 13:36-38) 한태일 목사 2011-09-05 1585
403 주일설교 정말 사랑해야 합니다(요 13:31-35) 한태일 목사 2011-08-29 2001
402 주일설교 가롯 유다(요 13:18-30) 한태일 목사 2011-08-22 1725
401 주일설교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17) 한태일 목사 2011-08-08 1702
400 수요설교 하나님의 무궁한 자비와 긍휼(애 3:19-26) 한태일 목사 2011-08-04 1850
399 주일설교 믿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요 12:37-50) 한태일 목사 2011-08-02 1590
398 주일설교 빛의 아들들이 되었으니(요 12:27-36) 한태일 목사 2011-07-25 1669
397 주일설교 주님을 섬기려면(요12:17-26) 관리자 2011-07-23 1705
396 주일설교 잘못된 믿음(요한복음 12:12-16) 관리자 2011-07-23 1577
395 수요설교 마귀의 능력을 초월하시는 예수님(마 8:28-34) 한태일 목사 2011-07-07 1662
1,,,6162636465666768697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