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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04-04 (월) 23:1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95    
참 믿음이 있다면(요 9:35-41)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의 표징(sign)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각자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하여 나름대로 기준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각종 은사라든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라든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늘 진실한 기도를 하며, 전도에 열심을 내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나타내며 사는 모습이라든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아주 중요한, 반드시 있어야 할 참 믿음의 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날 때부터 앞을 보지를 못하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되었는데 이 사람이 참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우선 그가 참 믿음을 어떻게 갖게 되었으며, 믿음을 갖게 된 결과 어떤 표징이 나타났는지 알아보면서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사람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라고 했다가 바리새인들로부터 출교를 당하였습니다(34절). 처음에 유대인들이 어떻게 네 눈이 떠졌느냐고 물었을 때에는 “예수라 하는 그 사람”(11절)이라고만 주님에 대한 고백을 하였었습니다. 즉 당시 보통 사람들도 다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고 있었으니 그도 평범한 칭호로 주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바리새인들 앞에서 심문을 당하면서는 ‘선지자’라고 주님에 대한 고백을 하였습니다(17절). 이유는 만약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예수님이 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하는 능력을 주님에게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 때문이었습니다. ‘선지자(prophet)’라는 호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 시간까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려고 친히 세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 요한을 마지막 선지자라고 하지요.
   이 사람의 믿음이 주님을 선지자라고 하는 그 정도 수준일 때에, 예수님께서 먼저 그 사람을 다시 만났습니다(35절). 왜냐하면 그 정도의 수준이 참 믿음, 구원 받을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때에도 이 사람을 먼저 찾아가신 주님은, 그의 영적인 눈도 뜰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그를 찾았습니다. 비록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그를 쫓아 냈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를 찾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영적인 눈은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은 스스로 주님을 찾을 능력이 없습니다(롬 3:10-12). 그러므로 과거에 우리를 먼저 찾아주신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주님께서 이 사람을 찾은 후에 물어보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35절하)? 여기 인자(Son of Man)는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육신적인 눈을 뜨게 해주는 분이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구세주를 믿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물어보신다는 자체는 그 사람의 반응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응답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6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누가 메시아인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가르쳐 주면 그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7절)고 하셨습니다. 그냥 ‘나’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가 바로 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믿음의 대상(object)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즉각 “주여 내가 믿나이다”(38절)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드디어 영적인 눈까지 떠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하는 자리에서 정말 그리스도로, 주로 믿는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참 믿음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 우리 주님을 그저 보통 사람들이 아는 ‘나사렛 예수’ 정도나 ‘선지자’ 정도로 알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기 전에 세상에서 학교에서나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혹은 글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나, 혹은 교회를 좀 다녀보았기에 들은 것은 있어서 말입니다. 성인군자 정도로 알고 있다던가,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라고 하는 기독교라는 종교창시자 정도로 믿고 있다면 참 믿음, 구원 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것이 참 믿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직접 예수님의 초청에 올바로 반응을 보이면서 응답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믿게 된 바로 그 날부터 참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불행하게도 참 믿음을 갖는데 오래 걸립니다. 1년, 2년, 3년 아니 혹은 10년 이상이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지 못하고 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적어도 이 시간 어떤 이유에서든지 교회에 나오셨으니 우리 주님의 초청에 올바로 응답하셔서 구원 받는 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그런데 참 믿음을 가졌을 때에 어떤 모습이 제일 먼저 나타납니까? 38절을 다시 보십시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하였습니다. 여기 ‘절하다’라는 원어의 뜻은 ‘예배하다, 경배하다’ 입니다. 즉 영적인 눈이 떠지고 구원을 받는 참 믿음을 갖게 되니 제일 먼저 주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그냥 기적적으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셔서 절한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을 먼저 찾아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하셨기에 감사하며 뜨거운 감격 속에 주님을 예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높여드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어떻게 보던 말던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발견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그 영광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 그 주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자리에서 어느 누가 그냥 밋밋하게 서 있습니까?
   그러므로 참된 믿음의 표징은 예배로 나타납니다. 경배와 찬양으로 나타납니다. 만약 ‘주님을 믿습니다’ 하면서도 예배할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믿습니다’ 하면서도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감격이 없다면 그 믿음은 가짜든지, 병든 것입니다. 가짜라면 앞서 언급하였듯이 너무 심각합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처럼 아직 영적인 소경이니까요. 39절 이하에 보십시오. 영적 소경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적으로 보지 못하면서도 보려고 하는 마음조차 없는 그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41절)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자신이 영적 소경임을 인정했더라면 주께서 영안을 열어주시고, 죄 사함을 허락하셨겠지만, 영적 소경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그저 죄를 가지고 영원히 멸망 가운데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을 못 뜬 것이 아니라, 뜨기는 떴어도 만약 병 들은 것이라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예배와 따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단어가 다르고 그 의미도 다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믿는 것이 곧 예배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신다면 학교나 직장, 가정에서 믿는다고 하여야 되지,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어디서 어느 때나 믿는다고 한다면 어디서나 어느 때나 주님을 향하여 신앙고백을 드리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영적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참 믿음을 갖게 되면 언제 어디서나 우리 예수님께서 동행하심을 믿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왔기에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경배(honor)와 찬양(praise)을 드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 5:16-18)고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예배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주님의 영광 앞에 너무나 감격하여 주님을 찬양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그 이름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예배자의 심령입니까? 아니면 입으로만 찬양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것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약 십여 년 전서부터 교계에서는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영혼이 산다’라는 표어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새로운 찬양을 연구하여 사용하고, 예배의 순서에도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설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유는 처음 교회를 찾아온 불신자들 그리고 초신자들, 혹은 타성에 젖은 신자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도록, 성령님을 체험하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분명히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즉 하나님 아버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께서 임재해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오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자리라면 그 곳에는 언제나 감동과 뜨거운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육체나 마음의 병들이 치유 받고, 무슨 염려나 불안이 사라지는 기적을 체험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예배를 함께 드려야 모든 성도들이 예배를 사모하며 주일을 기다릴 것입니다.
   예배는 그럴싸한데 그 안에 생명이나 능력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입으로는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가짜이거나, 믿음이 너무 얄팍하거나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려도, 찬양을 드려도 생명력이 없이 죽은 예배가 되고, 죽은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마음을 찢는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디서 첫사랑의 감격이 떨어졌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어 해결해야 합니다.
   물론 앞서 언급하였듯이 꼭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만 예배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삶 전부가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예배입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말입니다. 믿음의 고백이 어디서나 어느 때나 가능하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 주시는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차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어떤 환란 속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병과 투쟁 중에 있다 하더라도, 사업이 잘 안되고 직장 생활이 어렵더라도 그 형편에서도 주님을 예배하여야 합니다. 찬양해야 합니다. ‘예수님 믿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오, 구세주시오, 목자가 되시며, 친구가 되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심령에 감격이 솟아나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모든 고통을 감당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아 멘!
   여러분! 참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데 경배와 찬양은 잘 안 되는 분들이 계십니까? 어쩌면 훈련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 원합니다’라고 자주 외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을 시험하던 악한 영이 도망할 것입니다. 사탄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충동질합니다. 주님을 예배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찬양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성경 좀 보고 기도도 하려고 하면 자꾸 유혹합니다. ‘대충 보고 넘어가! 기도 빨리 마쳐! 오래한다고 응답이 있었냐?’라고 말입니다. 그런 유혹에 넘어가면 그 때부터 우리를 자기 마음대로 주장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이유는 믿는다고 하는 신앙고백에 예배가 따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찬양을 담고 사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감격을 담고 사십시오. 아름다운 시편의 말씀을 묵상하며 사십시오. 감히 사탄 마귀가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의 은혜를 받은 눈 뜬 사람처럼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며, 감격의 예배를 드렸던 모습이 항상 우리들의 모습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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