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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04-11 (월) 09:4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21    
양의 목자이며 문이신 예수님(요 10:1-10)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사는 길인지, 참된 행복의 삶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 길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모르기 때문에 죽도록 공부하기도 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고 애쓰거나, 몸을 혹사해서라도 돈을 벌려고 하며,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치며 노력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래서 세상 말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인생이나 혹은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인생을 가장 아름답고 풍성한 삶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멸망 당하지 않고, 우리 인생을 사기 당하거나 도둑질 당하지 않는 비결을 목자가 양을 치는 예를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십니다.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당시의 목자들이 양을 이끌고 다니는 풍경을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족장 시대부터 유목민족으로서 얼마든지 목자가 양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목자들이 자기 양을 이끌고 다니며 꼴을 먹게 하고 물을 먹이는 평화로운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든지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목자들은 하루 종일 양을 치다가 밤이 되면 자기 양들을 몰고 공동 우리로 옵니다. 웬만한 부자 목자가 아니면 자기 고유의 양 우리가 없습니다. 또 우기 때에는 집 가까운 곳에서 꼴을 구할 수 있지만, 건기 때에는 며칠씩 가야 꼴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일에 집에 돌아올 수 없으니 어두어지면 공동 우리에 자기 양들을 넣어 놓습니다. 이 양 우리는 보통 돌담을 사각형 모양이나 원형으로 만드는데, 거기에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목자들이 양 떼들을 문으로 다 들이고 나면 문을 닫고, 문 옆에 문지기가 있어 밤새도록 그 양들을 지킨다고 합니다. 문지기는 목자들이 고용한 사람이거나 목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문지기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들판의 도둑들이나 맹수들로부터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한 것입니다. 도둑놈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목자들이 하나 둘 나와서 문지기의 확인을 받고 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문을 통하여 우리 안으로 들어가 자기 양을 부릅니다. 양의 특징 중 하나는 눈이 너무 나빠서 그 시력이 -10 정도라고 합니다. 즉 약 1m 이상 되는 것은 전혀 보지 못합니다. 대신 청력이 뛰어나서 자기 목자의 음성은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 양들이 목자 앞으로 나온다고 합니다(3절).
   우리 인간들은 양들처럼 단점이 아주 많은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목자가 없으면 다가오는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눈이 나빠 어떤 길이 안전한 길인지, 참된 행복의 길인지도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가만히 살펴보면 때로는 천사보다 더 지혜롭고 존귀하지만, 어떤 때는 악마보다 더 지독하게 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마음이 어디로 쏠리느냐에 따라 무한히 아름다울 수도 있고 무한정 추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바른 길로, 참된 길로 인도되기만 하면 인간은 지속적으로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목자이신 예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인도함을 받으면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인간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목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지혜나 능력보다 더 큰 지혜와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즉 양이 살고, 풍성한 삶을 누리는 길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3-4절)고 하였습니다.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다 알고 있어 하나씩 부르면 듣고 자기 목자를 알아보고 따라 갑니다. 이미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양은 눈이 나쁘기 때문에 잘 보지 못하고 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이 움직일 때에는 눈으로 보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귀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지금 양이 자기 목자를 신뢰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거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갔더니 자기를 사랑하여 푸른 초장으로 인도되어 마음껏 먹을 것을 먹을 수 있었고, 무서운 짐승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때문에 고통 당하고 찢기고 피 흘린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고귀한 희생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주님을 의지하고 따라갔더니 해결되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또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주님께서 해결해주시리라 확신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삽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도 보는 것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고후 5:7)고 하였습니다. 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13:10-17).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아갈 때 승리하는 것입니다. 내일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서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목자의 음성을 듣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믿음이요, 주님께 속한 양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묵상하고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계속 들판에서 방황하던가, 무서운 맹수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거역했기에 40년 동안을 방황하며 뺑뺑 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좀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어쩌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4일 정도나 40일이 아니라 40년이 될 수 있습니다. 도둑놈의 음성에,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 심령에 갈등을 일으키고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떠듭니다. 될 수 있으면 자기 주장을 해야 되고, 남을 밟고 일어서야만 자신이 높아진다고 하며, 남을 넘어뜨리며 헤치라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음성은 우리가 남을 사랑하며 섬겨야 하고,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높여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음성을 듣고 삽니까?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이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7절). 1-6절까지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비유로 설명한 것을 못 알아들은 그들에게 또 “진실로 진실로”라고 강조하시면서, 자신이 양 우리의 문이라고 하시고 자신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서 자기 양들이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8절). 물론 주님보다 먼저 왔던 선지자들을 다 통틀어 도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들이나 9장에서 살펴본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주님도 이 세상에 도둑놈들이 우글거린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도둑놈들만 아니라 이리나 늑대 같은 맹수들이 양들을 삼키려고 동서남북에서 노리고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더욱 주님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을까요? 이유는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절)고 하셨습니다. 양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당연히 도둑이나 무서운 짐승에게 잡혀 먹힐 것입니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면, 예수님을 통하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절)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고 따르면 죄 사함을 얻으며,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먹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기에 구원 받지 못하면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고상한 사람이라는 명예로운 소리를 들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도 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죄를 숨길 수 없습니다. 죄의 결과인 사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이기고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오직 한 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요 14:6). 마치 양의 우리에 문이 하나 밖에 없듯이 말입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가는 자는 도둑놈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구원 받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모든 종교가 다 똑같다고 하면서 어디에나 다 구원 받는 길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한 길, 우리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진리를 믿고 따르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욕합니다. 배타적이다, 혹은 독선적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혼동하면 안됩니다. 사랑이란 명분으로 비진리와 타협하고 관용을 베푸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진리를 ‘사랑, 존중, 관용’ 이라는 명분으로 거짓말로 만들 수 없습니다. 비록 욕을 먹어도 진리를 지키고 주장하는 것이 복입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10절에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기 원합니다.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해 주신다는 뜻은 주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셔서, 천국가게 해 주시고는 그 다음에는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주시고는 더 풍성히 생명을 누리도록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자녀 삼으시는 것이라고 했으니, 어느 부모가 자식을 낳아 놓고 ‘그래 너 혼자 잘 살아봐’ 하면서 나 몰라라 합니까? 사생아나 가짜 자식이 아닌 다음에야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천국으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이 풍성한 생명이 만사형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믿고 만사형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간사하기 때문에 만사형통하게 되면 교만하여져서 망가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를 만사형통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434장 ‘나의 갈길 다 가도록’ 가사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는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영어를 보면, ‘For I know whatever befall me Jesus does all things wel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번역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님께서 모든 것이 잘되도록 하실 것이다’ 입니다. 즉 로마서 8장 28절 말씀처럼 무슨 일을 당해도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몇 개월 전에 이 찬송을 작사한 Fanny Crosby 에 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 일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면서 믿음으로 헤쳐나가 수많은 찬송시를 쓰신 분입니다. 이 분이 만사형통해서 이런 찬송 가사를 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생명이란 만사형통하게 해주신다는 뜻보다는 주님께서 모든 일을 선하게 이끌어 주시는 삶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라고 다 같은 생명은 아니지 않습니까? 숨만 겨우 쉬는 생명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생명은 그런 빈약한 생명이 아니라, 젊은 청년이 지칠 줄 모르고 뛰듯이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령에 기쁨이 넘쳐 흐르며, 감사생활로 말미암아 즐겁게 일하는 활기찬 생명입니다. 비록 원하고 바라는 것이 다 안 이루어져도, 어떤 경우에는 고통이 떠나지 않아도 그런 것이 우리의 역동적인 생명력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그럴수록 오히려 더 찬송하며 삽니다.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분명히 믿기 때문에 심령에 평안이 있습니다. 좀 부족한 것이 있어도 감사하며 삽니다. 주님 주시는 풍성한 생명 때문에 말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양이신 여러분의 삶의 목자입니까? 천국 가는 하나 밖에 없는 문이 되십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유는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더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말입니다. 아니 여러분들을 잘 인도하여 쉴만한 물가로, 푸른 초장으로 데리고 가서 꼴을 먹이시기 원하십니다. 도둑으로부터, 무서운 맹수로부터 지켜주시기 원하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온전히 신뢰하며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모든 것을 주님의 음성,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를 지켜주시고, 어떤 위기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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