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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12-15 (금) 01:20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253    
하나님이 신원하시는 심판(계 18:20-24)
여러분은 억울한 일을 당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누명을 쓰고 죄인으로 몰려서 손해를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랬다가 진실이 밝혀져서 그 누명이 벗어질 때 어떻겠습니까? 손해 본 모든 것이 회복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본문 20절에 신원하신다는 뜻은 억울하게 당한 대로 갚아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NIV 번역에 “God has judged her for the way she treated you”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억울하게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람들이 다 그를 반역 죄인으로 알고 욕하고 비난합니다. 재산도 다 빼앗기고, 가족들도 팔려갑니다. 완전히 망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반역죄, 역모에 가담한 것이 드러나면 삼족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최종적인 판결에서 무죄가 입증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가족도 되찾고 재산도 되찾게 됩니다. 대신 그 사람을 모함했던 자들의 반역죄가 드러나 그들이 가족과 재산을 다 빼앗기게 됩니다. 처형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잃어버렸던 명예와 권리가 회복되는 것이 바로 신원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20절)고 한 뜻입니다. 여기서 ‘그’는 바로 망하게 되는 바벨론, 로마제국을 가리킵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하고 가르치던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억울하게 죄인 취급을 당한 이유는 황제 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죄였습니다. 그들은 로마황제는 숭배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주로 고백하며 경배하고 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 신앙 때문에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는다 하여도, 아니 생명을 잃어버린다 해도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바로 당시 성도들이 그러하였으며, 사도와 선지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저 북한 땅의 지하교회 성도들과 지도자들이 그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그 때 당시와 비교하면 너무 좋은 환경에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성도라고 해서, 목사라고 해서 누가 잡아갑니까?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핍박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과 그 당시의 성도들이 믿는 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눈물이 없이는 신앙생활 하지 못했습니다. 주위에 순교하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성도들이었습니다. 비록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이 있다 해도 당시와는 비교할 수가 없겠지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실까요? 이유는 어려움을 통해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분명히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하여서 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사고방식을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옛 삶을 싫어하게 됩니다. 새 삶을 좋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기뻐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잠시 있다가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나그네의 삶, 순례자의 삶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세상에서 좀 손해보고 빼앗기더라도 괜찮습니다. 참된 영광과 상급은 훗날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신앙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통해 사탄, 마귀의 실체를 똑똑히 보게 합니다. 죄악을 보게 합니다. 인간의 잔인함을 보게 합니다. 사자들에게 찢겨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을 보고 즐거워하는 인간들 안에 있는 죄악을 보게 합니다. 물론 우리들 안에도 그러한 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계하게 하며, 성령의 소욕으로 절제함을 인하여 더욱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어려운 시련을 통과하면서 못된 죄성을, 기질을, 교만함을 꺾게 하십니다. 악한 자로부터 직접 고통을 당해본 자들은 그 악함 처절하게 증오하게 되며 포기하게 됩니다. 즉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실 그 날까지 훈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점점 주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21절) 하였습니다. 여기 큰 맷돌 같은 돌은 당시 쓰던 말이 돌리던 맷돌을 뜻합니다. 그렇게 큰 맷돌을 바다에 던지면 그 자리에 가라앉게 되어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성도들을 괴롭히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철저하게 망한다는 뜻입니다. 그 찬란했던 로마의 영광이 다시 회복되지 못합니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22-23절)라고 하였습니다. 현악기를 연주하는 자들, 관악기를 연주하는 자들, 성악가들의 소리가 그들 가운데서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금이나 은, 보석으로 세공하는 업자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는 곡식을 가는 맷돌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밤에 켜는 등불 빛도 사라졌습니다. 밤의 귀신들과 더러운 영들이 활개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사랑의 음성도 들리지 않습니다. 가정들이 완전히 붕괴된 것입니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로마제국 만이 아니라 그와 사업을 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던 이 땅의 왕족들이 복술, 즉 점을 치는 미신이나 우상을 섬기면서 만국을 미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24절)고 힘센 천사가 말합니다. 순교자들의 피에 대한 신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세상이 완전히 멸망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온갖 쾌락을 일삼으며 즐거워하던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날이 옵니다. 성도들을 그렇게 핍박하는 사탄 마귀의 하수인들이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을 날이 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으로 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제대로 누리지 못하던 성도들이 영원토록 기뻐하며 찬송할 날이 옵니다. 그러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신원하여 주십니다. 할렐루야!
물론 이것은 꼭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주님 재림하신 후에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지금도 이 은혜를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 가운데 기뻐하며 찬송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신원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로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여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도피하고 싶기도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일어나야 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가운데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고 한 말씀처럼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자녀를 삼으셨기에 나에게 있는 못된 기질과 고집, 교만을 꺾기 위하여 고난을 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이 아니었으면 결코 치유가 될 수 없고 성숙해질 수 없는 것을 잘 아시기에 허락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욥의 고백,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나를 어렵게 힘들게 한 가족들이나, 이웃들에 대해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다시는 동일한 문제가 나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받아들이고 인정하십시오. 내가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으로 여기십시오. 나에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내가 계속 성장해야 하며, 성숙해져야 함을 인정하십시오. 나에게 닥친 어려움 때문에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식을 원망하고 있다면 아직 믿음이 자라가야 합니다. 내가 그 고난을 감사할 수 있을 때 승리하는 것입니다. 뭐 그렇다고 또 다른 어려움이 안 생기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똑 같은 것이 나를 괴롭히거나 넘어지게 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다른 문제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훨씬 더 어려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푸는 방법은 똑 같습니다. 그 때 ‘왜(why)?’라는 질문보다는 ‘무엇을(what)?’ 주님이 원하시는지 묻고 기도하며 아직도 더 내가 낮아져야 할 부분이 있어서 이 어려움을 주셨음을 깨달을 때 그 고난은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는 그만큼 성숙해졌고 또 승리한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늘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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