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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8-04-23 (월) 05:5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01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 23:1-6)
지난 주 김남준 목사 초청 부흥사경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신, 기대에 부응했던 집회였습니다. 하지만 못 참석하신 분들도 있고, 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복습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으면서 제가 받은 은혜를 요약해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첫 시간 서론에서 시편 23편 전체의 구조를 설명하였습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여호와는 자신의 목자임을 고백하며(1절), 이어서 왜 목자가 되시는지를 설명하고(2-5절), 앞으로도 자신의 목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노래하였습니다(6절).

우선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 세 가지가 있는데, 1) ‘하나님(Elohim)’으로서 성경학자들은 ‘두려워하다’는 단어와 강함을 상징하는 ‘도토리 나무’의 단어로 풀이하여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강한 분으로 인간이 두려워해야 할 분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2) ‘여호와(YHWH)’ 로 ‘존재하다’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선택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고유하고 존귀한 이름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그들과 언약관계를 맺은 것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3) ‘주(Adonai, the Lord)’ 로 이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소유권을 고백하는 이름입니다. 주인이요, 주권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라고 다윗이 고백하는 것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은혜의 언약을 맺고 있기에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목자라고 함으로 자신과 인격적으로 만남이 있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자신이 과거에 양을 치던 목동이었기에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양 같은 자신을 목자처럼 실제적으로 돌보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성으로 깨닫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창조주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셨습니까? 정말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임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의 해결이, 그 답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철저하게 목자이신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마치 양이 목자를 의존하듯이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버려진 우리를,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주시고 돌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됩니까? 첫째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며, 쉼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2절)라고 하였습니다. 양들에게는 푸른 초장은 곧 양식입니다. 팔레스틴에는 미국처럼 푸른 초장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목자가 찾아서 데려가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푸른 초장에서 배부르게 먹고 눕게 하십니다. 쉬게 합니다. 또한 목이 마르다 생각이 되면 쉴만한 물가, 즉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해서 물을 마시게 합니다. 양들은 헤엄도 못하기에 본능적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무서워합니다. 양털이 물에 젖으면 무거워져서 그냥 가라앉게 됩니다. 그래서 목자가 얕은 시냇물을 막아 흐르지 않게 하여 마시게 합니다. 양을 아시는 주님께서 세심하게 배려하시며 돌보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거나 하면 불안해하고 염려합니까? 목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적어서 그렇습니다. 온전히 의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관계가 부실한 것입니다. 언약관계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알기에(요 10:14)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알기에 철저하게 신뢰한다면 불안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의지하며 살겠습니까? 돈을 의지하겠습니까? 결코 돈이 여러분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돈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며, 참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기 때문에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육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만드신 후에 영혼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을 닮은 기능들이 있습니다. 지성으로 생각하고, 감정으로 느끼고,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다른 피조물에 비하여 탁월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이 땅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공기, 물, 먹을 것 등 말입니다. 그런 것이 채워지면 육체는 삽니다. 그런데 영혼은 그런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영적인 하늘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은 채로 태어납니다. 죽은 영혼이 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버렸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자신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다 깨버렸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모든 인간들과의 관계도 사랑으로 맺어져 어떤 흠과 허물이 없는 좋은 관계가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자신의 영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소생시키셨다고 합니다. 그 큰 사랑으로 죄를 사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자신을 인도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죄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이 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의의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몸을 씻었어도 발을 씻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심각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회복시키셔서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이웃 사랑을 하게 됩니다. 희생하게 됩니다.
셋째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 왕으로부터 쫓김을 당하기도 하였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쫓겨 났었으며, 주위의 충신들이 다 그를 떠나고 겨우 몇 사람만 함께 하며 도망자의 신세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정말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을 경험하였습니다. 함께 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자기 자신까지도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외에 무엇을 주시지 못하겠습니까(롬 8:32)?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이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당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으면 곧 보고 싶은 주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있는 인물들 외에도 기독교 2000여 년 역사상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신 종들은 다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고난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찾아오면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신뢰하며 감당하십시오. 17세기 영국의 유명한 청교도 신학자였던 John Owen 은 ‘성도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있는 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까?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여기 ‘지팡이(rod)’는 눈이 나빠서 앞을 잘 못 보는 양들을 인도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막대기(staff)’는 끝이 뽀죡한 나무이기에 무기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맹수들이 양들을 공격할 때 대적하는 도구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졌다면 지팡이로 꺼내주셔서 인도하시며, 사탄 마귀의 공격을 받게 되면 막대기로 물리쳐 주셔서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위로하십니다.
넷째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넘치는 은혜 때문에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를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상을 베푸시고’라는 뜻은 밥상, 잔칫상을 말합니다. 당시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형제나 가족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리나 죄인들과 밥을 먹는 것을 비난했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밥을 먹고, 첫 성찬을 나누었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그들과 한 가족이 되었음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생명적인 교제를 뜻하는 것이 성찬입니다.
밥상의 차이는 누구와 함께 먹느냐에 달렸지요. 귀한 손님이면 진수성찬을 차릴 것입니다. 별로 가깝지도 않고 귀하지도 않은 손님이면 그냥 적당히 차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한 자녀로, 예수님의 형제 자매로 여기시니 얼마다 대단한 밥상이겠습니까? 그야말로 넘치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의 면전에서 상을 차려주십니다.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다윗은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사울 왕 앞에서, 반역자들 앞에서 높이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에 기름으로 바르셨다고 합니다. 당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이나, 백성들 편에서 중보의 역할을 했던 제사장들이나, 하나님 편에서 말씀을 선포하던 선지자들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성령이 임했다가 떠나기도 했습니다. 사울 왕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한 후에 회개하면서 간절히 구했습니다. 성령을 거두어 가지 말아달라고 말입니다(시 51:11). 그러나 신약에 들어와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는 결코 우리를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20, 행 18:10). 한번 인치신 성령이 우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엡 1:13).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니 내 잔이 넘친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은 다음에 어떻게 죽었느냐고 묻습니다. 그 말의 뜻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속에 살다가 잘 죽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우리의 가족들에게서나 함께 신앙생활하던 교우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목자되신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섬기고 산 사람은 미래가 어떤 삶이 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6절)라고 하였습니다. 우선 여기 ‘나를 따르리니’는 나를 추격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끝까지 추격하여 그 선함과 인자함이 사로잡으신다는 말입니다. ‘선하심(goodness)’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 관대하심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본질상 우리에게 악을 행할 수 없으신 분입니다. 무한히 선하십니다. 이 세상의 악은 죄의 결과이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죄인들이 죄를 지은 결과가 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선하심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핍함이나 인격적인 교제의 부실함 때문입니다.
‘인자하심(love)’은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언약 백성에게만 베푸시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스스로 소생할 가능이 전혀 없는, 자격이 없는 죄인을 향하여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는, 분수에 넘치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대한 확신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습니다.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습니다. 때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닥쳐도 이 사랑을 기억하고 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포함되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예방주사를 맞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아프기만 하지만 필요해서 부모가 맞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중에 병들지 말라고 말입니다. 부모를 믿으면 다 괜찮듯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맡기면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은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 원합니다. 당시에 여호와의 집은 성막 혹은 성전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꿈과 소망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세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교회에 하나님께서 탁월하게 임하십니다(마 18:20). 영혼의 가정입니다. 한 피 받아 한 몸이룬 가족입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외톨이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자신의 가족에게 온통 가있듯이 우리 하나님도 그의 가족인 교회에 마음이 다 가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양들은 교회(성도)를 사랑합니다. 꿈과 소망이 되는 교회(성도)를 위하여 헌신합니다. 하나님을 닮아 서로 너그럽게 용서하고 용납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느냐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정말 여러분의 목자이냐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굶주리며 고통스러워 하는 가운데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 평안을 주시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함께 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과거에도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선하시며 인자하신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며 영원히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생의 유종의 미를 잘 거두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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