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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8-07-16 (월) 06:5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8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히 11:17-19)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입니다. 아마 그 다음이 부모의 사랑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 사랑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하기에 성경은 이 아가페 사랑을 종종 부모의 사랑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믿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두 사랑 사이에 여전히 엄청난 차이는 있지만 희생하는 사랑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깨닫기 시작하면 철이 든다고 합니다. 철이 들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던 모습이 부끄러워 부모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기 원합니다. 부모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해드리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시작하면, 그 크신 은혜를 보답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준 은혜, 생명 주신 은혜를 보답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아 해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정말 믿음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창세기 22장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허락하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아들을 주셨지만, 약속을 성취하신 일을 인간 편에서 생각해 보면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마 아브라함은 첩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을 보내고 나서(창 21장), 보통 아버지들처럼 이삭에게 모든 사랑을 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삭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게를 지고 아브라함을 따라갈 정도였으니 십대 중반쯤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12:2)!
아버지 아브라함 편에서 생각하자면, 하나님의 요구는 참으로 너무한 것입니다. ‘기적으로 주신 아들을 이제 데려가신다니 내가 잘못 들었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에게 대항할 수도 있는 요구, 참 하나님답지 않은 요구라고 생각하고 그 명령에 망설이거나 불복종 할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다면 믿음의 조상으로, 영웅으로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무 말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다음날 아침 일찍 독자 이삭과 두 하인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도 준비해서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 모리아 산(지금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창 22:3). 모리아 땅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여기서 중요한 point 가 ‘내가 아이와 함께 돌아오겠다’는 선언입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19절)고 말하였듯이 아브라함은 비록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지만 그와 함께 살아 돌아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18절에도 언급하였듯이, 이 전에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자신의 씨가 하늘의 뭇 별들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하였기에(창 15:5) 조금도 의심 없이, 만약 하나님이 독자 이삭을 요구하시면 분명히 무슨 뜻이 있을 것이며, 아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17절)고 한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은 돌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얹었습니다(창 22:9). 그런 다음 그는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그 때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 성경이 적고 있지 않지만, 사실 그 순간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버지를 믿고 사랑하는 아들이 자기 손과 발을 결박할 때에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손을 들고 칼로 자기 아들의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 단 일초도 어긋남이 없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눈을 들어보니 근처 가시나무에 뿔이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수양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자기 아들의 생명을 취하는데 사용하려던 그 칼로 아브라함은 수양을 죽여 피를 내고, 아들 대신 번제물로 제단에 놓고 하나님께 바쳤습니다(창 22:13). 그리고는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창 22:14)라 불렀습니다. 히브리 말에 ‘이레’라는 말은 ‘준비하다, 제공하다’ 라는 뜻입니다. 즉 ‘이 곳은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보시고 채워 주기 위해 양을 준비해 놓으신 곳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며, 때때로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 하시기 위하여 최선을, 최고를 요구하시며, 그 때에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면 자신 스스로 준비해 놓으셨다가 허락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죽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제일, 가장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정말로 자신을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경외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으로 무조건적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를 한번도 보지도 못한 노아에게 홍수로 심판할 테니 방주를 지으라고 했을 때처럼, 자기 생각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아무런 토를 달지 않는 순종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일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요구하신다면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시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내게 무엇을 요구하실 때에는 분명히 무슨 뜻이 있으며, 준비해 놓으셨다가 허락해 주실 줄 믿고 순종합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은 것을 아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에는 아무 소망이 없는 줄 아시고 천국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죽게 하신 후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9절하)고 하였습니다. 여기 ‘비유컨데’는 ‘모형(Type)’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즉 이삭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고아처럼 외로운 줄 아시고 하나님의 가족을 만들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인 것을 아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요구하셨던 것을 우리에게 직접 주셨습니다. 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인도자가 필요한 줄 아시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주셨습니다. 목사와 지도자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한 줄 아시고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기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격려가 필요한 줄 아시고 교회의 형제 자매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그 뜻 안에서 허락하십니다. 믿음으로 그 품에 안기면 됩니다. 순종하면 됩니다. 그 축복을 다 누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까? 할렐루야!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테스트해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최선을, 최고를 요구하십니다. 그 때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당연히 최선을, 최고를 믿음으로 드리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거룩한 질투를 한다고 하였습니다(출 20:5, 신 4:24, 수 24:19, 나 1:2). 우상숭배가 가장 큰 죄입니다.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그 어떤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됩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그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최선이요, 최고였을 것입니다. 보통 아버지들처럼 어쩌면 아브라함의 이삭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였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신 아들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아들을 위하여 있어야 할 존재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자녀가 아니라 돈이, 재물이, 명예나 권력이, 정욕이, 취미생활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테스트 할 때 시험을 받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즉각적인 순종으로 테스트에 합격하고 시험을 이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초가 튼튼한 신앙이었습니다. 바른 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에 자기 아들을 죽이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며, 무언가 계획이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라 자신의 아들에게 불의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으로 그의 약속을 지키실 분이기에 아들이 죽는다 하더라도 살아날 줄 믿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잘 알고 믿는 분들은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못 드리겠습니까? 생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 귀한 생명을 주셨는데 최고의 것을, 최선의 것을 당연히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쳐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엄청난 것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최선, 최고를 요구하실 때에는 다 준비해 놓으시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최선을, 최고를 요구하실 때 아브라함처럼 준비된 어린 양을 손을 내밀어 받으십시오.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문제로 시련을 겪고 있습니까? 아니면 시험을 받고 있습니까? 자녀 문제로? 재정 문제로?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로? 어쩌면 하나님께서 테스트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증명할 때입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힘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저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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