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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9-04 (일) 01:2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559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약속의 자녀 (갈 4:21-31)


아마 우리는 거의 대부분 어릴 때 우리 집보다 부자이며, 행복하게 보이는 가정의 자녀들을 부러워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부모를 잘 몰라서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자신은 가난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며 주눅이 들어 산다면 그야말로 바보이며,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금 커서 나중에 알고 나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렇게 살 이유가 없었는데 말입니다.    
지난 주일(13-20절)에 바울은 육체적으로 몹시 연약한 자신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영접하며 바울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 줄만큼 사랑하였음을 감사하며 회고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참으로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지금은 마치 원수처럼 되었는지 너무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다시 만나게 되면 조용히 권면함으로 자신이 영적인 아비로서 해산의 수고를 하더라도 그 관계가 회복이 되고, 그 속에 주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바랐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다시 한번 해산하는 수고를 시작하면서, 그들이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비유를 들면서 설명합니다. 우선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21절) 라고 그들에게 묻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서 율법 아래 있고자 한 것입니다. 복음만으로는 만족을 못하고,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유대주의자들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율법 아래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방인이었던 그들의 눈에 유대인들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으로는 그들처럼 멋진 종교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복음만으로는 자신에게 만족시켜 주는 것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율법을 지키면 그 성취감과 자부심으로 자기 의가 생기고, 사회적으로도 유대인들처럼 인정을 받기에 그 아래에 있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이 무엇인지 듣지 못했느냐고 묻습니다(21절하).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율법에 따라 정죄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을 왜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율법 한 조항이라도 못 지키면 그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함을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22-23절)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 중 한 아들은 본래 아내, 사라에게서 태어났고, 다른 아들은 계집종, 하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도 그렇겠지만 그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이런 두 아들(적자와 서자)의 신분과 지위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계집종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그랬듯이 만약 적자 곧 본래 아내가 아들이 없었다면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있었지만, 적자가 있는 한 서자는 유산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누구냐 하는 것은 그 아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하였습니다. 서자는 상속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계집종 하갈을 통해 상속자를 얻으려고 해서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이었습니다(창 16장). 그러나 그 후에 태어난 두번째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한 아들이었습니다. 사라가 90세에 받은 아들입니다. 임신이 전혀 불가능한 나이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를 떠나 하나님 앞에서 그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 해서 다 같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다 같은 아들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자와 서자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육체로 말미암았는지, 약속으로 말미암았는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입니다. 육체로 말미암는다는 뜻은 내 노력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이는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도 서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 진리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적자, 곧 약속으로 되는 아들이 되기 원하며, 그렇게 살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는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 사람이 되고 나서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24절 이하에 두 언약을 비유로, 상징적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4-26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받은 언약입니다. 이 모세의 언약을 아브라함의 계집종 하갈이라고 합니다. 즉 모세의 언약, 율법은 어떻게 해서든지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보려고 애쓰는 언약으로 비유합니다. 곧 1세기의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의 수도로 그곳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은 율법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율법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유자, 우리의 영적인 어머니인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천국에 있는 시온성에 비유합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면 모든 성도가 도달할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히 12:22). 하나님의 약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받은 상속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적자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서자입니다. 하나님의 친 자녀는 자기 의를 위해, 자기 만족을 위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믿고 오직 믿음으로, 성령을 따라 신앙생활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은 그저 종교생활하는 육체의 자녀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사야 54장 1절을 인용하여,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27절)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포로생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에 새롭게 되어 더 많은 자녀들이 돌아오게 될 것을 의미했지만, 바울의 의미는 두 여인, 하갈과 사라의 장래 후손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처음에 자녀를 낳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셀 수 없는 수많은 영적인 자녀를 낳게 되어 젊은 하갈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육체로 낳은 유대 율법주의는 쇠퇴하게 되고,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낳는 자녀들은 많아 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2000여년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절)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29절)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이 젖을 떼던 날 어머니 사라가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는 것을 보았습니다(창 21:9).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14살이 많았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이유는 자기가 서자이기 때문입니다. 적자인 이삭이 태어나는 바람에 아버지의 재산 상속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 때처럼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성령으로 태어난 약속의 자녀가 된 자들이 육체로 난 자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1세기부터 시작해서 오늘날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참 성도들은 육체로 난 종교인들에게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약속의 자녀들이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우상을 섬기는 로마인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중세시대에는 로마 천주교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많은 종교개혁가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19세기부터는 이성주의, 인본주의자들, 무신론자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가 없다고 하지만 사실 종교인입니다. 자신들의 철학과 사상을 믿는, 우상을 믿는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30절)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라가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창 21:10)고 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당연히 상속자가 이삭이기 때문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어 버립니다. 이처럼 만약 갈라디아 교인들이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자들이라면 지금 핍박을 하는 율법 아래 있는 유대주의자들을 내어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 육체로 난 종의 자녀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결론은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31절)고 하였습니다.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녀이기에 그 기업을 받게 되느냐? 바로 계집종 하갈의 아들이 아닌 자유하는 사라에게서 난 약속의 자녀가 그 기업을 이어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백성이라는 말이 너무 중요합니다. 이스마엘은 언약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삭이 언약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받아 누리는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어리석게 율법 아래, 육체로 마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래와 같이 요약합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육체로 난 자            성령으로 난 자

   계집종 하갈에게서            자유하는 사라에게서
   이스마엘 – 자연적으로        이삭 – 초자연적으로
   옛 언약 (시내산 언약)            새 언약 (예수님으로 맺은)
   1세기 예루살렘            하늘의 예루살렘
   율법주의 종교 (인간의 노력으로)    진정한 기독교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새 언약은 약속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성령으로 난 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계보를 잇는, 아니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예수님의 계보를 잇는 참된 약속의 자녀들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의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육체로 난 자들로서 그저 종교인이라면 참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늘 염려와 근심에 얽매이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선택하라고 합니다. 율법 아래 종노릇하며 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 것이냐? 사탄 마귀의 종으로 살 것이냐, 하나님의 자녀로 살 것이냐? 유명한 C. S. Lewis 는 “결국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을 향해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라고 하는 사람들과 또 다른 부류는 하나님이 그를 향해 ‘네 뜻대로 하라’ 고 하는 사람들이다. 전자는 믿음의 사람들이요, 하나님 나라 시민들이며, 후자는 (자기 의를 위하여 율법을 지키려는) 일을 하는 지옥의 노예들이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부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약속의 자녀들이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 은혜의 진리만을 붙들고, 믿음으로만 살기를 바랍니다. 먼 훗날 새 예루살렘에서 다 만나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언약의 자녀들이라면 절대로 육체로 난 자녀로 돌아가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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