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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9-15 (목) 23:41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418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벧전 3:13-22)
여태까지 사도 베드로는 로마제국 아래 흩어져 살면서 많은 고난을 받는 디아스포라 성도들에게, 힘들고 어려워도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나타내라고 하셨습니다(벧전 2:9). 이 사회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말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서로 사랑하며, 공동체 정신(Team Spirit)을 가지고 겸손히 불쌍히 여기며 복을 빌어주라고 하였습니다(3:8-12).

오늘은 의를 위하여 억울하게 고난을 받을 때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믿음의 태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12절; 시 34:15)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오늘도 그의 자녀들을 향한 눈을 떼지 않으시며,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13절) 라고 한 것처럼, 그들이 힘써 선한 일, 옳은 일은 하면 핍박을 받으며 고난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보통 때에는 우리가 순결하고 정직하게 옳은 일을, 선한 일을 하면 해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 때문에 억울하게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아직 사탄, 마귀가 공중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상황이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럴 때 어떻게 해야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낼 수 있는, 고난을 잘 이길 수 있는 5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14절) 하였습니다. 1) 고난을 받을 때 자신이 하나님에게 복을 받는 자라고 여기라고 합니다. 오히려 행복하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체가 복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첫 산상수훈 설교 팔복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이, 어떤 계획이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면 언젠가 하늘의 상이 있을 것을 믿고 바라는 것입니다. 2) 그 고난을 두려워 말고 소동하지도 말라고 합니다(14절하). 공갈 협박을 두려워(fo,bew) 말라는 것입니다. “소동하다(tara,ssw, be troubled)” 라는 뜻은 마음이 괴로워하거나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것을 알고 그런 공포나 괴로움으로부터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3)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15절상) 한 것처럼, 이런 모든 상황의 주권자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구별된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좋은 예가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입니다(행 7장). 복음 때문에 유대주의 형제들에게 돌에 맞는 핍박을 받는데도, 피 흘리며 죽어 가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처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들을 미워하며 저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스데반처럼 어떤 상황도 주님이 배후에 있음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4) 그런 상황에도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15절하) 하였듯이, 천국 소망이 있기 때문에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 속에서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까?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물어올 때, 고난 속에서도 소망이 있기에 견디는 것을 보고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올 때 대답을 항상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 대답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다만 온유(gentleness)와 존중함(respect)로 해야 합니다. 우리말 번역에 ‘두려움’이 잘못되었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친절하고도 부드럽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감동을 받았기에 묻는 것입니다. 오만한 태도로 비판적인 말로 하면 곤란합니다.소망에 대해 물어보는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5)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16절)고 하였습니다. 깨끗한 양심을 말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양심입니다. 속사람의 인격(integrity)을 말합니다. 사실 이것보다 더 능력이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깨끗하고 선한 양심을 소유한 자라는 것을 상대방이 안다면, 핍박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한 것입니다. 아니 그래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17절)고 한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악을 행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부끄러울 것이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니 좋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고 인내하면 결국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욥의 경우에도 그러했습니다. 사탄 마귀의 엄청난 시험을 받아 모든 것을 다 잃었어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인내했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11)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18절 이하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의 본을 들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영적인 의미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사도신경을 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18절)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확증이 되었습니다(롬 5:8). 이 세상 역사상 유일무이한, 죄가 없으신 의인으로서 모든 불의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지 않았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영적인 가치나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의 희생에 만족하셨고,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나오는 모든 사람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완전하게 용서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육체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고 장사를 지냈지만, 영혼은 살리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흘 만에 육체적으로도 부활하심으로 다시 부활체로 많은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22절)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모든 만물을 그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며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다시 오셔서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19-20절)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사도신경에 고백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그 영혼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kh,russw, proclaim)고 합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라고 한 사탄 마귀의 영들, 타락한 천사들에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고 희희낙락하던 그들에게 자신이 사흘 후에 부활하며 승천하실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승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20절은 그들은 노아 시대에 타락한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으며 자식을 낳게 되면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때에 홍수의 심판으로 망한 자들을 상징합니다(창 6:1-5). 그러나 그 가운데 노아의 가족 8명은 구원을 받은 사실을 상기시키며, 오늘날의 세례 받는 것과 비유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21절)고 하였습니다. 그 물을 세례로 상징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에게 물은 심판의 상징이지만, 구원을 받을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상징인 것입니다. 물론 세례 자체가 육체의 더러운 죄를 없이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양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세레로 인하여 말입니다. 즉 진실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주로 영접한 성도들은 선한 양심으로 삽니다. 죄를 용서받았고, 성령님이 인치셨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16절에서 말한 선한 양심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면 복이 있는 자입니다. 열심히 옳은 일을 하는데 핍박을 받는다면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십니다. 억울하게 고난을 받을 때 천국 소망을 가진 자 답게 참고 인내하며 행동한다면,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억울한 고난을 당하는데도 기쁘고 즐겁게 잘 감당하며 인내하느냐’고 말입니다. 그 때 우리의 소망을 말하며,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온유와 존중함으로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 위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십시오. 어떻게 잘 감당하셨나요?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절하)고 하였습니다. 고난 뒤에 영광의 시간을 생각하며 참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 또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난은 무엇입니까? 아니 의를 위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 있는 자로서, 두려워하거나 소동하지 않고, 더욱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세계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난 핍박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로마황제도 신으로 섬길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주이심을 인정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의 선한 양심으로 우리 주님처럼 앞에 있을 궁극적인 즐거움을 위하여 묵묵히 고난을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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