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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6-08-12 (토) 04:4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667    
[10/30/05] 받은 은혜를 기억하라 2
받은 은혜를 기억하라 2 (고린도후서 12:7-10)
계속해서 지난번 부흥회에 받은 은혜를 기억하기 원합니다. 둘째날 저녁 집회에서는 오늘 본문으로 “고난의 은혜”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먼저 강사 목사님께서 삶에 대한 해석을 잘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지혜자라고 하였습니다.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전 8:1)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에 대한 해석을 잘 해야 지혜로운 사람이요, 그 얼굴에 빛이 난다는 말씀입니다. 불평할 수 있는 일들을 감사의 조건으로 해석하고, 원망할 수 있는 일들을 기도의 조건으로 해석하고 사는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안 날 수 있겠습니까?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도 단점보다는 장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단점에 대한 해석을 잘 하는 것입니다. 장점, 좋은 점을 보고 그저 칭찬과 격려를 해 주는 것입니다. 예: 아이가 국어가, 산수가, 미술가, 음악가를 받아오면 ‘문학가가 되겠다, 예술가가 되겠다’라고 말해주라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와서 현미경을 가지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판단하려 하지 말고, 성도들에 대하여 해석을 잘 하라고 하였습니다. 과거에 대한 해석도 잘 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으신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런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결국엔 우리 편에 좋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더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려고 주신 일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년 후 나는 폭삭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나는 5년 후에 지금보다 훨씬 잘 될 줄로 믿는 사람들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상처의 쓴 뿌리가 있으면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5절에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하였습니다. 상처는, 쓴 뿌리는 마귀의 꾀임입니다. 왜 뿌리라고 한 것 같습니까? 그 쓴 뿌리에서 싹이 나고 열매가 나서 주위를 망치는데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더럽게 하는 마귀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상처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원하는 것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정말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는, 마음이 비어진 상태라면, 자아가 죽은 상태라면 상처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쓴 뿌리가 생길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마음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그 무엇으로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신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살면 어떤 상처도 받지 않고 오히려 해석을 잘 하게 됩니다.
삶의 해석 가운데 가장 잘 해야 하는 것이 고난에 대한 해석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난이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한 여러가지 고난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와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그러려면 고난에 대한 시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렌즈를 바꾸어 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렌즈로 말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였습니다. 정말 고난은 우리의 스승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말씀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도 한 가지 배우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아들이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고난이 예수님에게도 유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고난으로 참된 순종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고난이 왜 내게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몰라도 한 가지 반드시 알 것이 내게 유익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답을 몰라도 그저 믿으세요. (괴테와 딸을 그에게 주고자 했던 사람과의 대화). 내게 다가온 어려운 일들에 대하여 잘 몰라도 말씀을 믿고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에 그저 고민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들의 시기로 말미암아 웅덩이에 던져졌지만 보디발 장군의 가정 총무가 되지 않았습니까? 보디발의 가정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던져졌지만 애굽의 총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미국 대통령의 예: 링컨, 와싱톤, 루스벨트 등도 심한 고난을 잘 겪고 나서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강영우 박사도! (로버트 슐러 박사의 말 인용) 스펄전 목사님도 No cross, no crown! 이 땅에서 가시 면류관이 천국에서는 상급이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이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욥의 예) 그럼에도 욥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하였습니다. 그 모든 고난이 다 나를 위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75)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육체의 질병이 안질이나 간질병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사탄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그것 때문에 자꾸 낙심이 되고, 열등감, 비교의식 속에 믿음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기뻐한다고 9절에도, 10절에도 고백합니다. 자기는 가시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가시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 덩어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왜 은혜가 됩니까? 첫째는, 고난이 겸손의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7절).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그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계시의 말씀을 받았기에 충분히 스스로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시의 은혜 때문에 겸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만은 사탄의 최고 무기요,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기에 교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교만하여서 망한 사람이 한 두 사람입니까? “여호와께서는 겸손한 자를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시 147: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으니라”(약 4:6하),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하) 하였습니다. 또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하였습니다. 그러니 가시 때문에, 고난 때문에 겸손하여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께서 높여 주시니,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 바로 축복이 아닙니까? 고난 때문에 겸손을 배운다면 고난 만큼 큰 은혜가 또 어디 있습니까? 고난을 그렇게 해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고난이 기도의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8절). 바울이 그 고난이 떠나가도록 세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세번은 완전 숫자를 상징합니다. 수없이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끊임없이 간구했다는 말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 아닙니까? 교제하는 것 아닙니까? 고난 때문에 수없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였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가 아닙니까? 사실 그 자체가 축복이 아닙니까? 여러분! 어려울 때, 고난이 찾아올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는 기도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처음 나오는 기도가 셋의 아들 에노스가 몸이 약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창세기 4장 26절에서야 있습니다. 그 유명한 사사 삼손이 언제 기도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잘 나갈 때에는 들릴라의 머리 베게를 베고 누어만 있었지 않습니까? 나중에 두 눈이 뽑히고,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야 두 기둥을 붙잡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고난 당할 때에 고민하지 마시고 기도하십시오. 여려운 일을 당할 때에 걱정하지 마시고 기도하세요. 그리하면 고난이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고난이 능력의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9-10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하였습니다. 가시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였다는 것입니다. 내 약함을 인정할 때에 그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인간적으로 너무 강하여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강해져서 안 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강하여져야 합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딤후 2:1) 하였습니다. (인도 선교사 간증 – 3년 동안 한 사람도 주께로 인도하지 못하여 고민하던 가운데, 어느 날 교회에서 하나님께 불평하며 던진 한 마디 말 -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 – 그리고 나가자 교통 사고를 당하여 두 다리가 부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하다가 드린 기도가 생각이 나자, 여태껏 자기 열심만 가지고 선교 일을 해 온 사람이었기에 실패를 거듭한 그가 정말 하나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심령이 기쁨이 넘치게 되어 병원에 있으면서 전도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지고 나서야 이스라엘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바울도 결국 가시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능력을 받아 귀하게 쓰임 받은 세계 선교의 주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날 새벽, 주일 새벽 집회에는 골로새서 3장 15-17절로 “감사의 은혜”라는 말씀을 주셨었습니다. 고난도 그러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니 감사할 수 있지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처럼 15절, 16절, 17절에 계속 감사하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감사! 감사! 감사!
어떻게 하면 감사의 은혜를 누린다고 하였습니까? 첫째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를 주장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15절). 자신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함으로 심령에 평안이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도 평화하라고 합니다. 평강을 위하여 우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말씀의 씨를 마음 밭에 뿌리라고 하였습니다(16절). 말씀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거하게 되면 싹이 나고 감사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 입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암송하십시오. 그리고 셋째로 추수할 때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추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17절). 무엇을 하던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드러내지 말고 다 예수님께서 하게 하셨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면 주님을 위하여 일을 시작하라고 하였습니다. 전도든, 봉사든, 찬양대든, 청소든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 말고, 한 두 사람부터 사랑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면 감사의 은혜가 넘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어떤 고난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해석을 잘 하십시오. 고난이 여러분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임을 믿으십시오. 잘 배우십시오. 고난은 겸손하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고난은 기도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나의 약함을 온전히 주께 맡기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게 합니다. 그러니 은혜가 아닙니까? 할렐루야!
그리고,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 심령에 말씀이 풍성히 거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슨 일에나 말에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십시오. 주님을 위하여 일을 하지 않고 계시면 무슨 일이든 시작하십시오. 누구를 사랑하십시오.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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