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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6-12-12 (화) 01:4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628    
[12/3/06] 섬기며 사는 삶2
섬기며 사는 삶 II (레위기 5:7-10)
지난 주일에는 ‘섬기는 삶이 무엇인가?’ 섬김의 정의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섬기는 것이다(빌 2:5).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가 주님을 섬기다가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함이었음을 말씀드렸습니다(빌 1:29). 오늘은 섬김의 이유와 결과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우리 형제 자매들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까? 그렇게 섬기고 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는 삶을 주님께 무엇인가 자신이 베푸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내가 이렇게 섬기니까 하나님께서 당연히 내게 축복해 주셔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자체가 특권입니다.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아무에게나 주님을 섬기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의 규례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시적으로나마 지은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평민이 죄 용서함 받는 제사는 흠이 없는 암 염소나 어린 양의 암컷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레 4:27-35).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바칠 형편이 못 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형편에 따라 제물을 달리 정하셨습니다. 제사는 드리고 싶지만 가난해서 도저히 양이나 염소를 바칠 수 없는 사람들이 속죄 제사를 드리러 나아올 때에,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왔습니다(레 5:7). 그래서 하나는 속죄제물(sin offering)로 다른 하나는 번제물(burnt offering)을 삼았습니다.
이 제사가 드려지는 그림을 머리 속에 한번 그려 보십시오. 먼저 비둘기 한 마리가 제단 위로 올려집니다. 제사장이 그 제물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써 제물을 드린 자의 죄가 그 비둘기에게로 전가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비둘기의 목을 비틀어 끊고 피를 흘리게 합니다(레 5:8-9). 이어서 제사장은 뚝뚝 떨어지는 피를 지성소에, 단 사면에 뿌리고 나머지 피로 단 아래까지 흥건히 적시게 합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자신의 죄를 전가받은 비둘기가 목이 꺾인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죄의 무서움과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하였던, 죽어 마땅한 자신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에 감격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드려지는 속죄 제사에 이어지는 것이 번제입니다. 제사장은 이제 남은 한 마리의 비둘기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란 제물을 불에 태어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속죄제를 통하여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 속에 헌신을 향한 번제가 포함되어 있음을 봅니다. 즉 정말 죄 용서함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헌신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여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속죄제물로, 번제물로 자신을 드리고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죄를 위하여 보혈을 흘리시고, 그 모든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며 드리다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 구속의 은혜를 아무 공로 없이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 안에는 부르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실 때의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어 가는데 기여해야 할 사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학교, 진리의 학교, 기도의 학교, 순종의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이 됩니다.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과 그 위대한 구원 계획에 대하여 배우고 공부하며,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실천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과하며 섬기게 됩니다. 또한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살게 됩니다.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사회에서건 그 고귀한 목적적 수단으로서의 삶을 누립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목적에 기여하는 삶은 내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 안에 담긴 소명을 느끼며, 그것을 따라 헌신하며 살아가는 삶들이 연결되며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주님을 위하여 살지 않으면서 기도 생활이나, 전도 생활, 봉사 생활에 열심을 낸다는 것은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단지 자기 만족 혹은 육체에 속한 열심일 뿐입니다. 그런 섬김은 자기가 기분이 나빠지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만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근거한 순수한 동기가 아니기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일을 하기만 할 뿐, 그 일을 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 일이 아무리 거룩한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바를 우리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기뻐함이 순종의 동기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여야 합니다. 자기 사랑을 비워야 합니다. 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섬기는 삶은 여러분의 영적 성장에 말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섬기는 일이 크냐 작으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의 크기가 아니라 일에 임하는 믿음, 순종의 동기, 일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이런 것들을 통하여 여러분을 성숙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준 것도 그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42). 따라서 일의 크기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큰 일에 종사하고 있어서 그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쓰레기를 줍고 치워도 그 작은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느끼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큰 사람이며, 지금 놀라운 영적 성장의 과정을 경험하고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지금 무엇이라도 섬기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마음을 다하여 섬기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섬김을 받는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으십니까? 섬기십시오. 주시는 직분을 겸손히 받고, 조용히 하나님께만 바쳐지는 섬김이 될 때에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가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 죄 사함의 은혜, 십자가에서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은 채 살아갑니까? 많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 구원의 감격은 과거의 경험 속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들의 삶이 은혜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뒷받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름, 자기 자랑, 교만, 고집, 정욕, 미움, 인색함, 거짓, 불신 등 이런 것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받은 바 은혜도 간직되지 못하고, 주시는 은혜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결단입니다. 굳은 의지입니다. 마치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8)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처럼 말입니다. 확정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고난이 오면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참여하고, 기쁨이 오면 그 속에서 주님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묵묵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섬김의 모든 과정을 끊임없이 자기 성숙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런데 남이 알아 줄 때까지만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섬김을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되면 이내 섬기려는 마음을 접어 버립니다. 스스로 싫증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별로 망설이지 않고 누가 뭐라고 해도 그만둡니다. 그는 섬김에 있어서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참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고난 속에서 견딜 수 있는 데까지만 견딘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었는데도,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때 우리 안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일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참는 것은 진정한 인내가 아닙니다.
또 섬기다가 한계를 만날 때,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새로운 상황으로 도피한 것뿐이기에 자신의 영적 성숙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매번 섬김의 상황은 바뀌지만 그 안에서 그들은 늘 비슷한 한계를 경험하고, 그 한계 앞에 스스로 도망하는 일만을 반복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늘 일하는 사람으로 비칠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한 번도 하나님의 손에 다듬어져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크고 괄목할 만한 일을 섬겼느냐,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섬김을 감당했느냐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섬기는 중에 고난이 찾아와도 끝까지 믿음으로 반응하며 자기의 자리를 지켰느냐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버시(Persis) 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로마서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의 사역에 동참하여 초대교회에서 함께 일했던 여러 평신도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문안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하였습니다.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도 바울에게 소중한 동역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주 안에서 수고한’이라는 수식어만 붙어 있습니다. 하지만 뒤에 나오는 버시에게는 ‘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라는 말과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가 함께 붙어 있습니다. ‘많이 수고하고’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는 버시가 바울은 물론 하나님의 마음에도 흡족했던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표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버시의 섬기는 삶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그가 주 안에서 많이 수고했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 은혜와 사랑이 섬김의 동기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다른 사람들이 어찌하든지 주님만 바라보며 섬기겠노라고 뜻을 세우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 섬기다가 낙심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시선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하는’버시라는 표현도, 헬라어 원어를 따라 직역하자면 수동태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버시입니다. 과연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일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과 사도 바울, 그리고 로마교회 성도들입니다. 섬기면서도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버시는 섬기면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온유한 성품으로 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친 성품이 아니라 부드러운 성품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험한 세월을 살면서 깊이 다듬어진 인격을 소유하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험한 세월을 지나면서 거칠고 황폐한 성품을 갖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많은 일을 하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기에 차갑게 변해버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따뜻하게 다듬어진 인격을, 주님을 닮은 인격을 소유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다른 결과를 빚어내었을까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바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없이 자신의 열심이나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섬기는 사람은 섬길수록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요. 그러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섬기는 사람은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며, 오히려 세워주지요.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죄 용서함의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그 다음은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롬 12:1) 하였습니다. 아니 그 크신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을 드립니다. 섬기며 삽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한 목적이 있음을, 계획이 있음을 믿고 섬기며 삽니다. 그렇게 섬기고 살 때에 더욱 하나님을 경험하며 영적으로 성장해 감을 체험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주님 만을 바라보고 섬깁니다. 일이 크건 작건 상관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주 안에서 많이 섬기고 사랑을 받았던 버시처럼 하나님께로 인정 받게 됩니다. 마음을 확정하여야 합니다. 결단하여야 합니다. 나와 내 가족은 주님을 섬기겠노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몸을 섬기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영적으로 성숙하여 주님을 온전히 닮는 그 날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핑계대지 마십시오. 사실 그렇게 섬기지 않으려고 여러가지 이유를 대는 것 아닙니까?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유교적이나 도덕적인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 그 나라와 의를 위한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 주를 위하여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알고 행하지 않으면 죄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 가운데 거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을 아시지요. 그래서 회개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후회하고 자백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섬기는 것이 특권이요 축복인 줄 알고, 보다 나은 나 자신을 위하여 섬기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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