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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8-03-31 (월) 23:1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517    
[3/30/09] 서원을 지킴으로
서원을 지킴으로 (사도행전 18:12-18)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생은 약속입니다. 약속으로 시작하여 약속으로 마감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대인 관계의 그 기초가 약속이지요. 사업도, 결혼 생활도 약속이 아닙니까? 그래서 한 사람을 평가할 때에 그 사람이 얼마나 약속을 지키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을, 신실성과 정직성을 판가름 합니다. 우리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이 약속 때문이지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역동성의 근원도 약속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유는 우리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언약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맨 처음 아담과 언약을 맺었었지요. 아담과 하와가 그 언약을 깨뜨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만 말입니다. 그 이후에 노아와 언약을 맺으셔서 다시는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징표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도 언약을 맺으셨고,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고, 다윗과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우리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새 언약이라고 하지요. 신약입니다. 옛 언약은 구약이구요. 즉 성경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신앙생활의 열쇠도 하나님과 한 약속을 잘 지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한 약속, 이것을 오늘 본문에는 서원이라고 하였습니다(18절).

사도 바울은 이제 2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고 다시 예루살렘을 들렸다가 자신을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이 일제히 바울을 대적하려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하여 1년 반 정도 머물렀었는데, 그 중간에 갈리오가 고린도 시가 속해있는 아가야 지방의 총독이 되었습니다(12절). 그가 총독이 된 후 몇 개월 지나서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여 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회당과 시장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자 유대인들은 시기와 질투로 그가 율법을 어기며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부추기어 로마법을 어긴다고 고소한 것입니다(12절). 이에 대하여 바울이 변호를 하려하자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들에게 바울에게서 로마법의 위반 사항을 찾지를 못하고,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을 하였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14-15절) 하면서 저들을 재판정에서 쫓아 내어 버립니다. 그러자 저들은 로마 시민권이 있는 바울에게는 어떻게 못하고 공연히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화풀이로 때립니다(17절). 사실 이것도 불법인데 무리들의 눈치를 보고 갈리오 총독이 묵인해 줍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를 받은 이전 회당장 그리스보가 사임을 하고 바울을 쫓기로 한 후에 그 후임으로 소스데네가 직분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왜 바울이 마음껏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내어 버려두었느냐는 화풀이로 때렸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절에서 이 소스데네를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사람도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이지요. 그러니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바울처럼 좀 열심히 주의 일을 하고자 하면 참으로 사탄 마귀의 조종을 받아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비방과 모함, 때로는 모욕을 당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같이 욕하고 싸워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품어주어야 합니다. 그 뒤에서 배후 조정을 하는 사탄, 마귀들을 미워할 뿐 그 사람 자체는 품어주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 마귀가 지고 그 사람이 우리 편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후에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시편 94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 . .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4, 17-21)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을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대적하는 사람들을 감싸 안고, 품으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사탄, 마귀를 이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기서 며칠 더 있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형제들과 나누었을 것입니다(18절). 그리고 나서 그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는 도중,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과 일찍이 한 서원이 있기에 그 약속을 지키고자 말입니다. 바로 나실인의 서원입니다. 이는 일찍이 한나가 기도로 얻은 아들 사무엘을 받고 한 서원이기도 하며, 삼손의 서원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으로서는 하나님께 나실인의 서원하면서 지키는 말씀이었습니다. 민수기서 6장 1-12절에 의하면 나실인의 서원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은 것이며, 시체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고, 미래의 어느 시점까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시점이 겐그레아에 도착한 때였음이 분명합니다. 머리를 깎은 다음, 후에 그 머리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번제로 드려져야 했습니다(행 21:23-26). 사실 바울 자신은 언제나 은혜로 구원 받은 유대인임을 주장했기 때문에 이런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었지만, 유대인으로서 그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약속이요, 이방인들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했기에 그들과 여러가지로 동일시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서원 하나라도 철저히 지키는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입었음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자 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고난과 핍박이 와도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태껏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과 서원을, 약속을 해 보지 않으신 분은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해 본 적이 없는 분입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세상의 모든 대인 관계가 이 약속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하나님과 수 차례 서원을 해 오신 여러분들, 그 서원을, 약속을 잘 지키십니까? 가만히 보면 우리의 서원은 주로 조건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조건을 들어주셨는데도, 갚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어느 순간에 또 약해져서 무너지고, 번번히 서원을, 약속을 깨는 여러분들은 아닙니까?
어쩌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감동을 못 받는 것 같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감동을 받는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 내릴까요?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좋은 때가 언제입니까? 서로에게 감동을 줄 때가 아닙니까? 목사가 성도들에게, 성도들이 다른 성도들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감동을 줄 때가 가장 기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께 감동을 드렸던 신앙의 선배들이 많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기억해 보세요. 그들은 비록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갔어도 하나님과의 서원을 지켰습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화형을 당하는 위협이 그들 앞에 있어도 서원을 지켰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얼마나 하나님께서 감동하였겠습니까?
또한, 비록 그의 일생에 단 한번의 죄로 고통을 치렀던 다윗이지만, 그는 얼마나 하나님께 감동을 드렸으면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말을 들었을까요?(행 13:22) 그래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셨지 않습니까? 그는 목동의 자리에서 자신을 왕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서원을 하나님께 드리고 지켰는지 모릅니다. 시편을 묵상해 보세요. 한 예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 .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7-9,11)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아무리 힘들어도, 생명의 위협이 있어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이었습니다.
한편 자신은 왕이 되어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이 여섯 평의 성막에 계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위하여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드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비록 하나님의 뜻 가운데 비록 그의 아들이 이루어 드렸지만 말입니다.
성경 외에도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난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정말 하나님과의 서원을, 약속들을 잘 지킨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께 감동을 준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들도 그 대열에 서서 우리 주님의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남은 평생이 이런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서원을 지키기 원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게 씻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사랑하는 여러분!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두 부류의 신자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사람들이고, 또 다른 부류는 그 분께 감동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값싼 부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그 말씀에, 신실한 성도들에게 감동만 받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여러분들은 아닙니까?
정말 다윗이나 바울은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께 기쁨이, 감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혼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주신 삶의 목적을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무슨 약속을 해도 꼭 지켰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감동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임종시에 한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바울 같이 위대한 사도이기에 우리들과 상관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신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며 살면 주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가지고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울은 어떤 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에 담대하게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께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고난 가운데 주님 만날 날을 기다리신다면 주님께서도 여러분에게 드릴 면류관을 들고 이 세상에서의 삶의 목적을 다 이룬 다음 만날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다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다가 죽은 성도의 장례는 슬퍼만 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라, 기뻐할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어떤 서원을 하였습니까? 어떤 약속을 하였습니까? 첫 사랑의 감격 속에 눈물, 콧물 흘리며 주를 위해 살겠노라고 헌신하였던 시간을, 약속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약속을 철저하게 잘 지키는 사람을 보면 감동을 받고 신뢰가 가고 축복을 하고 싶은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이시겠습니까? 혼신을 다하여,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킴으로 오늘도, 내일도, 남은 여생이 하나님께 감동을 주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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