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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09-10-26 (월) 22:1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58    
[10/25/09] 거룩한 능력을 나타내는 삶
거룩한 능력을 나타내는 삶 (사도행전 28:1-6)
여러분들의 삶에는 비록 세상 속에 파묻혀 살지만 세상과는 다른 구별된, 거룩한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삶의 모습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그들과 동일한 생각과 마음 가짐으로 행동하며 살아갑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무언가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아마 지난 주일에 본 닉 부이치치의 동영상도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감동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삶이 아닙니까?
그와 반대로 우리 때문에 세상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를 받고, 그 영광이 가리워진다면, 주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을 막고 있다면 우리는 정말 큰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성도(聖徒)라 하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교회라 하면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비록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동화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며, 정복해야 하지요. 마치 배가 바다를 항해하지만, 바닷물 속에 빠지지는 않고 그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 연어가 물결을 따라 내려가지 않고, 거슬려서 올라가듯이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을 향하여 도전을,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거룩한 모양을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이 시대는 거룩한 모양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의 능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능력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오순절에 성령강림으로 인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로마에까지 가게 되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예루살렘의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큰 부흥을 기록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바울과 그 선교팀을 중심으로 하여 소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이 증거된 것과, 드디어 선교여행을 마친 바울이 로마로 향하기 전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로마를 멋지게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멋진 것과 하나님 편에서 멋진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것처럼 죄수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파선하여 침몰하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고 위로를 받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한 결과 배에 탔던 276명 모두가 다 살아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만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위기를 피하기 위하여 자기만 살려고 도망을 치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삶은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못한 삶입니다. 오히려 배가 침몰할 줄 알면서도 끝까지 남아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 수 있도록 구하고, 최후에 자신도 사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바로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이지요. 거룩한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더 큰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로 하여금 위기 가운데 비참하게 망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까지 우리의 손에 맡겨두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죽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과 함께 배를 탔던 모든 사람들이 광풍에 밀려 어디론가 이르렀는데, 그곳이 알고 보니 이탈리아 반도 바로 밑에 있는 시실리 섬에서 아래로 60마일 떨어진 멜리데(Malta) 섬이었습니다(1절). 그레데 섬의 미항에서 지중해의 아드리아 바다로 엄청난 거리를 광풍에 떠밀리면서도 배가 이곳까지 와서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기적이었습니다. 극심한 고생과 고통은 겪었지만, 결국 그들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와 아주 가까운 곳에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일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죽으라고 헤맨 것 같은데, 결국 나중에 뒤돌아 보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던 곳에 오게 되었고, 시간적으로도 별로 손해 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때때로 뿌연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막연하고 막막한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걸음을 정확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이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거룩한 능력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반응을 하면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자기를 학대하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과 행동을 하면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며, 좋은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무언가 그들과 다른 것을 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배에 탔던 바울과 그 일행이 도착한 섬은 무인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토인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정확한 번역은 원주민입니다. 당시 이 섬에 살고 있던 페니키아인들인데 헬라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민족들을 모두 토인(barbarian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그들이 바울과 그 일행에게 특별한 배려를 합니다. 이유는 아드리아 해 바다에서 유라굴로 광풍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떤 신이 돌봐주는 사람들로 여긴 것이지요. 그래서 잘 영접하여, 물에서 헤엄쳐 나온 그들에게 마침 비까지 오는 것을 보고 나뭇가지를 모아서 불을 피워준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직접 자신이 나무를 날라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바울이 여기까지 오는데 고생한 수고 때문에 지쳐서 편하게 쉬려고 했을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손수 나뭇가지를 모아 가지고 왔습니다.
이 때 사탄이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정말 아차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울이 가져온 나뭇가지들 사이에 독사가 한 마리 숨어있었는데, 바울이 나뭇가지를 태울 때 뜨거우니까 나와서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3절). 그리고는 그 상태로 대롱대롱 매달려서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광풍을 헤쳐 나오며 영적 전쟁이 끝난 줄을 알았는데, 아차 하는 순간에 사탄은 독사를 통하여 그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사탄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사탄은 언제든지 우리를 공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다 지쳐서 쉬고 있을 때 바울이 부모의 심정으로 스스로 나서서 일하다가 그만 독사에게 물린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서 큰 불상사는 없었지만, 자칫 잘못했더라면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될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독사에게 물린 것은 원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독사에 물린 것을 보고 금방 미신적인 생각을 한 것입니다.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4절) 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원주민들은 바울이 탄 배가 광풍을 만나 다 죽을 것으로 여겼으나, 죄수들이었지만 죄가 없어서 바다신이 살게 해 주었나 싶어 호의적으로 잘 대접했는데, 이제 바울이 독사에 물려서 죽게 되었으니 뱀신이 그를 가려내어 죽게 하는 줄 알고 정말 살인한 죄수로 여긴 것입니다. 여기 ‘공의’라는 단어가 원어에 첫 글자가 대문자로 쓰인 것을 보면, 그들이 숭배한 신을 가리킵니다. 누가가 사용한 단어에 의하면 아마 그들이 믿었던 정의의 여신으로 생각됩니다. 진짜 죄수이니까 당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때로 우리들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뜻하지 않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마음이 약해져서 내가 전에 잘못한 일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갈 때에는 어떤 사탄의 독이라도 우리를 헤치지 못합니다. 바울은 손에 달린 뱀을 흔들어서 불에 던져 넣어버렸습니다(5절). 그리고 조금도 손이 붓거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멜리데 섬 원주민들은 바울이 독사에게 물렸지만, 전혀 해를 입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가 신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려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6절)고 하였습니다. 신이라고 말하는 자체는 잘못된 것이지만, 그에게는 어떤 능력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보인 태도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의연합니까? 다른 사람들 같으면 독사에게 물리고 난 후에 당황하고 걱정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태연하게 대처합니다. 그냥 독사를 털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원주민들도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여 그를 신이라 부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독사의 독마저도 주의 종 몸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함으로 치열한 영적 전쟁을 하는데, 사탄의 독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독사의 독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독입니다(약 3:8). 어떤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거짓말을 지어내어서 독을 쏘아대는데, 그것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일종의 사탄의 저주이지요. 또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분노에 차서 독이 있는 말을 쏘기도 합니다. 문제는 자아가 죽어 있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야 상관이 없는데, 상처를 받지 않는데, 자아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상처가 너무 깊어서 잘못하면 그런 독이 한평생을 망치는 수도 있고, 그런 독이 빠져나가는데 몇 달씩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지 않도록 늘 조심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어떤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그럼 그렇지’ 하는 당연한 반응을 보이고 삽니까? ‘광풍이 몰아치면 절망할꺼야. 독사에게 물리면 죽을꺼야. 당하고 나면 다 그만둘꺼야. 이정도 되면 화를 낼꺼야. 절대로 용서못할꺼야’ 하는 세상 사람들의 반응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에서 우리가 믿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며, 주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습니까? 전혀 구별이 안 되는데 말입니다. 너희들도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습니까?
한번은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서 옷을 찢기고 매를 맞은 후 감옥에 갇혔습니다(행 16:19절 이하).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억울하고 분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할텐데, 그들은 오히려 깊은 옥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모습을 죄수들이 보고 들었다고 합니다(행 16:25). 그렇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냥 거룩한 모양만 가지고는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무언가 다른 행동과 말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능력입니다. 정말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것처럼 나타내는 능력의 삶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거룩한 능력은 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안되기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구하여 얻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무슨 말과 행동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에 답하시고 행동하십시오. 우리는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절망이나, 분노가 아니라 소망 가운데 용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발 다른 것을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거룩한 능력을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며,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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