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160,738
오늘방문 : 15899
어제방문 : 17300
전체글등록 : 3,869
오늘글등록 : 2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9-07-27 (월) 11:0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074    
[7/26/09] 유종의 미
유종의 미 (사도행전 24:22-27)
지난 주일 설교에서 언급하였습니다만, 이 세상에서의 우리 인생이 끝나고 흙으로 돌아갈 때에 하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듣게 될까요?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다 잠들다’ 라고 묘비명에 쓰여진다면 참으로 후회 없는 멋진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처음에는, 시작은 좋은 것 같은데, 잘 하는 것 같은데 나중이, 끝이 좋지 않게, 잘못 끝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말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 라는 격언이 있지만, 시작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끝이라고 믿습니다. 인생의 노년이, 아름답게 끝을 맺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것입니다.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 삶의 끝이 정말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시작이 있습니다. 그 시간은 영원까지 계속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 보기에 너무 잘 사는 것 같아도, 행복한 것 같아도 그 끝이 멸망으로 이르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항로를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표지대로 가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가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끝이 너무 비참합니다. 내 눈에 좋고, 편안하고, 복이라고 생각하는 길은 이 세상의 넓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내 눈에는 험하고 고생이 되는 길 같은데, 그 끝은 영원한 축복이 있는 길은 좁은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신앙은 이 인생의 끝을 볼 수 있는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끝을 보지 못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을 택하며 삽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바울은 이 인생의 끝을 보고 살은 사람이기에 그런 멋진 신앙고백을 하였다고 한다면, 벨릭스 총독과 같은 사람은 이 끝을 바로 보지 못하고 현실에 얽매어 비참하게 인생을 끝 맺은, 아니 영원한 멸망의 문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고소를 받고 바울이 로마 법정의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신을 위한 변론과 증언을 다하자, 이제 벨릭스 총독이 판결을 내릴 차례입니다. 안타깝게도 바울이 무죄인줄 알면서도 유대인들의 눈치와 환심을 사기 위하여 판결을 미루는 것이 오늘 본문에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면서 친구를 만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는 2년이 넘게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또한, 아마도 아내 때문에 바울을 불러 기독교에 대하여 듣는 시간도 갖습니다. 사적으로는 처음 벨릭스를 대하는 그 때 바울이 그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오는 심판을 강론”(25절) 합니다. 왜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올 심판을 설교하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왜 그와 같은 메시지를 주셨을까요? 당시 벨릭스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거꾸로 하나씩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장차오는 심판(judgment)을 이야기한 것은 자신이 로마 법정의 재판관으로서, 심판관으로서 지금 고소한 사건과 증언을 듣고 바른 심판을 내려야 하는데, 그는 그 일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바울이 믿는 도에 대하여 아내로부터 자세히 들은 바가 있기에 그가 무죄한 줄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눈치 때문에 천부장 루시아를 기다리겠다고 22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천부장 루시아가 바울이 무죄인 것을 알고 자기에게로 보내었던 것입니다(23:29). 자기에게 심판할 수 있는 권력이 주어졌을 때에 책임 있게 올바로 재판을 해야 하는데, 그는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유익을 위하여 권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애써 보아야 잠시 후에 내려올 그 자리인데도, 그 훗날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어리석게도 마냥 그 자리에서 권력을 행사할 줄 압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27절에 베스도가 새로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고, 역사에 의하면 자기는 네로 황제에게 불려가 잘못 다스린 것에 대하여 처벌을 받아 폼페이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네로 황제 옆에 자기 친형 팔라스가 있었음에도 동생을 돕지 못하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사실 친형 팔라스 때문에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가까이는 벨릭스 자신이 맞이할 이런 심판이요, 멀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됨을 선포한 것입니다.
둘째로, 절제(self-control)를 이야기한 것은 벨릭스는 너무 무절제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적으로 말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24절에 등장하는 아내 드루실라도 남의 아내를 거의 빼앗다시피 해서 삼은 것입니다. 드루실라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 딸로서 헤롯 아그립바 2세의 여동생입니다. 아주 미모가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16살 때 이 오빠의 중매로 수리아에 있는 에메사의 60살이 넘은 아지주스 왕과 결혼하였습니다. 정략결혼이었지요. 그런데 이미 아내가 있었던 벨릭스가 수리아를 방문하였다가 이 미모의 드루실라에게 반해버리고 어떻게 자기 아내를 삼을까 연구하다가, 마술사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헛소문을 내게 했다고 합니다. 아지주스 왕이 드루실라와 계속 살다가는 불에 타 죽게 된다는 예언을 하면서 소문이 퍼지게 합니다. 그래서 그 왕이 1년 만에 드루실라를 내버리자 자기가 가로채서 데려온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과 머리를 사용하여 방탕한 삶을 산 것입니다.
원래 ‘성(sex)’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로 결혼 관계 안에서 즐기도록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 ‘성’의 남용을 얼마나 싫어하십니까? 바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벽난로의 불처럼 절제가, 통제가 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이 절제에 대하여 선포한 것으로 여깁니다.
셋째로, 의(righteousness)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벨릭스 총독에게서 ‘의’는 정말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불의로 많은 재물을 축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는 금권정치였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유대, 팔레스틴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의 권력으로 대단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 가난한 선교사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바람에 자주 그를 불렀다고 합니다(26절). 아마 선교여행 중에 구제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준 사람이니 뭐가 나오겠지 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감옥에서도 약간의 자유를 주면서 돈을 좀 긁어내자는 꿍꿍이 속으로 친구가 수종 들게 나두라고 한 것입니다(23절). 벼룩이 간을 빼먹는 경우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소유욕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돈이 필요해서 열심히 버는 사람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저 모아 놓고 흐뭇해 하는 사람입니다.
요즘도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쓸 줄은 모르고 그저 모을 줄만 알아서, 가족도, 친구도, 성도들도, 이웃도 다 버리는, 돈 때문에 관계를 깨뜨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벨릭스가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찾아보니 원래 그는 노예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로마 클라디우스 황제 때에 자유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과거에 하도 못 살은 것이 한이 맺혔는지, 이제는 돈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가만히 보면 과거에 너무 가난했던 사람이 돈 맛을 알면 그렇게 인색해 지는 것을 봅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다 채워 주시기에 열심히 일하면서 벌어, 잘 사용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사람을 살리는데, 영혼을 살리는데 사용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나눌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러한 벨릭스의 삶을 너무도 잘 알기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입을 통하여 “의와 절제와 장차올 심판”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도를 선포한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난 벨릭스의 반응을 보십시오.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25절하)고 합니다. 두려워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마음에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찔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쳐버리고 맙니다. 결단을 못 내린 것입니다. 미루고 맙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겠다. 때가 되면, 시간이 되면, 틈이 나면, 언젠가는 . . . 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미루는 사람들 중에 정말 나중에 결단하는 사람은 0.1% 정도 밖에 없습니다. 사탄의 공작에 넘어가는 것이지요. 바울을 또다시 불러놓고는 돈이 나올까 기대하는 그가 아니었습니까?
성경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하)라고 합니다. 지금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축복의 기회인데, 인생의 끝을 아름답게 맺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7)고 한 말씀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벨릭스는 폼페이로 귀양간 후에 주후 79년에 베수비후스 화산이 폭발하여 드루실라에게서 난 아들과 함께 불에 타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 중에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으시면, 마음에 찔림이 있으시면 즉각적으로 회개하여 돌이켜야 합니다.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미루는 것은 사탄의 조종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약간의 정도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벨릭스처럼 살아갑니다. 인생의 끝이 어떻게 될른지 보지를 못하고, 눈 앞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욕심을 따라 삽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sex, 권력만 잡으면 이 세상에서 다 되는 것인 양, 행복해지는 것으로 믿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엄청나게 누려본 솔로몬 왕이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고, 준비하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끝이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이 세상에서 인간적으로 누릴 것 다 누려보고 산다고 해도 끝이 그렇게 허무하게, 비참하게 끝나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니 얼마나 비참한 인생입니까?
그런데 아직도 벨릭스처럼 돈을 모으기 위하여, 육체적인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높은 지위에 앉아 사람들을 부려보고 싶어하거나, 자랑하거나, 자기 이름을 좀 높여보려고 불의한 삶, 무절제한 삶을 계속 사시겠습니까?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라면 이해하겠습니다만, 하나도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어리석게 사시겠습니까?
이 땅을 하직한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성경은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하였습니다. 벨릭스가 이 진리를 듣고 정말 깨달았다면, 결단하고 돌아서지 않았겠습니까? 기회가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돌아서십시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세상으로 향하던 걸음을 주님에게로 돌아서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십시오. 마음을 열고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내 날이 아닙니다. 오늘 바로 이 순간이 내게 주어진 시간일 뿐입니다. 마음을 열고 영생의 선물을 받으십시오. 그 선물을 받아 누리고 사십시오. 비록 좀 좁은 길이고, 힘든 길이지만 잠시 잠간이면 이생의 삶에 끝이 옵니다.

아니 이미 우리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시는 교우 여러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벨릭스처럼 살아서 되겠습니까? 우리의 끝이 어떤지 알고 있으면서도 돈, sex,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고 살아서 되겠습니까?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런 유혹을 넘어서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 주의 나라를 위하여 써야 값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베풀고 살아야, 나누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하늘에 쌓이는 상급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만큼은 성적인 충동을 이기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절제할 수 있어야지요. 순결을 지키며, 부부 사이에 서로 만족을 주도록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헛된 명예나 권력을 쫓으며 살겠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의의 심판이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만왕의 왕을 뵈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 날까지 참고 인내하며, 절제함으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 바랍니다. 베풀고 삶으로 끝이 아름답게 장식되기를 원합니다. 그 날을 위하여 오늘 비록 좁은 길이라 하더라도, 힘든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주어진 건강, 시간, 몸, 물질을 사용하여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여 힘있게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내일로, 나중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만 아십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위한 권고가 우리들을 향한 권고인 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7-58)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250 주일설교 [11/11/09] 수요예배 - 하나님의 선물, 분복을 누리자 한태일 목사 2009-11-13 2021
249 주일설교 [10/29/09] 수요예배 - 하나님을 만난 성도의 삶 한태일 목사 2009-11-13 1863
248 주일설교 [11/8/09] 치유하시는 주님 한태일 목사 2009-11-10 2048
247 주일설교 [10/25/09] 거룩한 능력을 나타내는 삶 한태일 목사 2009-10-26 1859
246 주일설교 [10/18/09]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한태일 목사 2009-10-19 2046
245 주일설교 [10/11/09] 인생 항로에서 광풍을 정해경 2009-10-15 2070
244 주일설교 [10/7/09] 수요예배 - 주 안에서 친구의 유익 정해경 2009-10-14 1913
243 주일설교 [10/04/09] 하나님이냐, 하나님의 복이냐? 정해경 2009-10-05 1902
242 주일설교 [9/27/09]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통한 연합 정해경 2009-09-29 1824
241 주일설교 [9/23/09] 수요예배-성도의 삶의 기준 정해경 2009-09-29 2131
240 주일설교 [9/20/09] 즐거이 성심으로 드림이며 정해경 2009-09-29 1944
239 주일설교 [9/13/09] 하나님 중심의 신앙 한 태일 목사 2009-09-16 2179
238 주일설교 [9/9/09] 수요예배 - 전도서 강해 6 한 태일 목사 2009-09-11 2033
237 주일설교 [9/6/09] 나와 같이 되기를 한 태일 목사 2009-09-08 2102
236 주일설교 [9/2/09] 수요예배 - 전도서 강해 5 한 태일 목사 2009-09-04 2062
235 주일설교 [8/30/09] 훈련으로 되는 제자 한 태일 목사 2009-08-31 2061
1,,,7172737475767778798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