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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9-04-07 (화) 09:5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84    
[4/5/09] 우시는 예수님
우시는 예수님(눅 19:37-44)
아마 이 전에 정통 개신교회(Protestant Chruch)를 다녀보신 분들, 혹은 우리 교회에서 조금이라도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종교개혁’, 혹은 ‘개혁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니 교회를 다녀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도 고등학교 세계사 수업시간에라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도 잠시 마르틴 루터의 회심에 대하여 언급을 하였었는데, 그가 회심한 후에 1517년 10월 31일 로마 교황청에 대항하여 목숨을 내걸고 비텐베르그 성당 정문에 95개 조항의 항의문(thesis of protesting)을 붙였습니다. 천주교의 잘못된 교리를 95개 조항으로 지적함으로 무너졌던, 타락했던 초대교회 기독교 신앙을 재건하자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위클리프나 허스와 같은 개혁주의자들의 외침이 종종 있었으나 본격적인 개혁운동은 루터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불길이 쯔윙글리나 칼빈을 통하여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청교도 정신으로 이어져서 오늘날까지 개혁주의의 신앙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 종교개혁의 동기가 천주교 성직자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가들에 의하면 실제로 그 당시의 천주교회, 성직자들의 타락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직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래서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추기경에 오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루터 바로 전 세대의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여러 명의 첩을 두고, 4명의 사생아를 낳은 파렴치한 자였습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성직자 축첩 제도까지 만들려고 하였던 정말 구제 불능의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고아원의 태동은 그 때에 신부들과 수녀들 사이의 성범죄로 말미암아 생긴 사생아들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루터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의 취미는 도박이었다고 합니다. 귀족들과 추기경들을 모아놓고 밤새도록 돈을 걸고 카드 놀이를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죽은 영혼들의 죄까지 사해 줄 수 있는 권위가 있다면서 면죄부를 팔아 많은 돈을 축적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한 청렴한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사보나롤라는 ‘네 자식을 몹쓸 놈으로 만들려면 로마 천주교의 성직자가 되게 하라’고 절규하였었습니다.
이렇게 교황이나 추기경, 신부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것은 종교개혁 당시의 시대 상황을 묘사하는 데는 정확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종교 개혁의 동기로 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만약 윤리적인 문제였다면, 루터나 칼빈은 결코 로마 천주교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천주교회에 남아 잘못된 윤리를 정화하며, 도덕적 청결한 삶을 위하여 투쟁하였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의자들이 막강한 권력의 로마 천주교와 결별하면서 순교의 각오로 개혁운동을 가속화 시킨 것은 윤리, 도적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가 하나님을 잘못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윤리가 아니라 믿음의 내용 때문에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너무 중요합니다. 윤리나 도덕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합니다. 타락한 윤리나 도덕으로 인한 잘못된 행동은 몇 사람만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가르침은 수 세대에 걸쳐 수천만의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래서 이단이 무서운 것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할 자리에 교회의 전통, 의식(儀式)을 집어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의 공로를 집어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의 영광을 집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예수님처럼 행세합니다. 마리아를 무죄한 사람으로 숭배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겠다고 일으킨 운동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오늘은 2000여년 전에 예수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일주일을 채 남겨놓지 않고, 이미 예언되어진 구약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시고자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주일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로마 정권을 뒤엎고 이제 유대인 자신들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줄 알고 종려나무(Palm Tree) 가지를 흔들고 찬양을 하였기에 종려주일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 그의 제자들을 불러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30절).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군중들과 제자들은 지금까지 보아온 예수님의 기적들을 마음에 떠올리며 기쁨과 환호 속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로 여기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 하며, 이전에 성탄의 감격을 노래하던 천군 천사들의 찬양을 합니다(눅 2:14). 이제 바로 다가온 예수님의 메시아적 운명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지, 잘못된 믿음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로 인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찬양 자체는 옳은 것이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또한 이렇게 찬양하는 제자들과 온 무리와 달리, 유대주의 바리새인들은 이 노래가 예수님께 맞추어져 불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이 같은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책망을 예수님께 요구하고 있습니다(39절). 제자들과 온 무리들도 잘못 믿고 있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또한 다른 각도에서 잘못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러자 바리새인들을 향한 주님의 대답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40절)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 향한 제자들과 무리들의 환영과 찬양은 비록 메시아에 대하여 잘못 믿고 있다 하더라도 그 노래 자체는 참이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 들어있었던 것이었기에 어느 피조물이라도 이를 거스릴 수 없다고 하는 예수님의 의지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 잘못된 믿음 앞에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을 위하여, 화평을 위하여,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 메시아를 보내셨건만 이들은 아직도 영적 소경으로 남아있으니 안타깝고 슬펐던 것입니다. 그래서 42절에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하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교만과 전통, 관습에 얽매어 더 이상 메시아를 바로 볼 수 없다면, 자신들을 잃어버린 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기필코 하나님의 정하신 심판의 날들을 피하지 못할 것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 또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43-44절)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문자적으로 주후 70년 로마 황제 디도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취되었으며, 또한 영적으로는 마지막 하나님의 대 심판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죄인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를 거절함으로써 이로 인해 장차 올 심판 날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혹시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 교회를 향하여, 우리 가정을 향하여, 우리 개인을 향하여 울고 계시지는 않겠습니까? 당시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들이 지금 자기들 나름대로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잠시 후면 거의 다 자신을 배신하고, 버리고,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다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있습니까? 나의 인간적인 기대가 무너져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시겠습니까? 나의 인간적인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셔도 예수님이 ‘주(Lord)’이십니까? 한 피조물로서 당연히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한 심령이 그 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날을 놓치게 되면 슬퍼하며 우십니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될 일을 생각하고 우십니다.
잘못 믿는 것이나 믿지 않는 것이나 다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올바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 대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이나 할 것 없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성직자의 자질이 저하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앉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왜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조차 삶이 정직하지 못하여 불신자들에게 조롱을 받아야 합니까? 문제의 근본적인 본질은 잘못된 신앙,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를, 가정을 부패하게 하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닐지 몰라도 바로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로 믿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이미 축복을 받으신 것입니다. 적어도 개혁주의 신앙을 근간으로 하는, 하나님 말씀 중심의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듣고, 성경을 배우시니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믿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셔야 합니다만 말입니다.
지난 주일 사도행전 22장 강해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사도 바울 당시에 하나님 은혜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단호한 도전을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십자가의 복음,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를 변질시키는 가장 큰 대적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난 20세기 말부터 오늘날까지 복음의 혼합화 현상이 극심해 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에다 심리학을 뒤섞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들먹이지만 실제 내용은 프로이드라든지, 스키너 등의 심리학자의 주장의 영향을 받아 설교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음에 사회주의를 뒤섞어 버립니다. 설교에서 주님의 말씀보다는 마르크스, 레닌의 철학사상이 더 강하게 들리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음에다 동양 철학 명상 사상을 집어 넣어 버립니다. 또 어떤 이는 포스트 모던이즘의 영향을 받아 복음에 세상 Show Business 사상을 집어 넣어 버립니다. 사람을 즐겁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당이 공연 장소가 되어 버리고, 교인은 구경꾼이 됩니다.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가 판을 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의 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16) 라고 하였는데, 실상 십자가의 원초적인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 4:2)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결심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지금 당장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본다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생각하시면서 우시지는 않으시겠습니까? 비록 함께 순서에 맞추어 찬양을 부른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니면 참으로 주님께서 기쁘시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회심하지 않은 심령을 바라보며 울고 계십니다. 첫 종려주일의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들을 바라보고 우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때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우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온갖 수난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실이 나의 죄 때문인 줄 알고 믿으면, 회개하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시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며 진심으로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찬양을 드리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구원에 이르는 데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니 이미 구원의 은혜 속에 살아가시는 성도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대로 믿지 못하는 삶은 혹시 아닙니까? 입으로는 믿는다 하면서 행동으로는 말씀에 불순종하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도 주님은 울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 가식적인 신앙생활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성경대로 바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조건 순종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주위에 잘못 믿고 있거나, 믿지 못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참된 의미입니다. 영혼 사랑보다 더 귀한 사랑은 없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 126:6)라고 하였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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