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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10-20 (금) 07:56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367    
변화에로의 헌신(빌 3:10-11)
아무리 큰 집, 새 집을 원하여 열심히 돈을 모아 우여곡절 끝에 이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화목하고, 행복하지 못하면 큰 집이, 새 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새 집이 좋은 것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불행할 뿐입니다. 비록 작은 집, 헌 집에 살지라도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며, 꿈과 비전 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면 그것이 행복인 것입니다. 큰 집, 새 집에 산다 해도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으면 큰 집, 새 집을 가져도 오히려 불행인 것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이며, 어떤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선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좋게 변해야 합니다. 점점 조금씩이라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고생하게 됩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을 돌아보며 변화를 받아야 할 부분이 없는지요.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고, 옛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어떤 공동체 안에서든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당 짓는 것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서 주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house arrest)에 갇혀 있을 때에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워진 빌립보교회를 향해 쓴 서신입니다. 천에 자주색 염료를 입혀 파는 이방인 장사꾼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행 16:12-15, 33-34). 성경은 이 여인이 하나님을 공경하는(예배하는, 경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교회의 최초의 새신자들은 귀신들렸던 하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고 믿음을 가지게 됨으로, 또한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에 기도하고 찬송할 때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려 간수가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자살하려는 것을 바울이 막고 복음을 전하여 믿게 되어 그 자신과 권속들이 세례를 받게 됨으로 개척멤버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애정을 가지고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을 알려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기쁨의 생활을 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믿음에 굳게 서서 기뻐하며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서신서 전체에 계속 흐르는 주제가 ‘기뻐하라’ 입니다. 기쁨이라는 단어가 모두 16번 반복됩니다.
3장 문맥은 바른 진리를 알아서 잘못된 진리인 율법주의를 전하는 자들을 물리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니 자신처럼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를 다 버리라고 하였습니다(1-9절). 하나님의 의는 율법을 지키거나 선한 일을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10-11절) 하였습니다. 10절의 본동사는 ‘알려고 한다’입니다. 이 동사를 수식하는 것이 ‘본받아’ 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선 알려고 하는 것이 세 가지를 말합니다. 경험적인 지식입니다. 첫째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려고 합니다. 더 많이, 더 깊게, 더 친밀하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알면 알수록 더욱 주님을 사랑하며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를 알기 원했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려고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능력, 죽어도 사는 능력 그 놀라운 능력을 더 많이, 더 깊게, 더 효과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하는 것인지 알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한 고난을 잘 감당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주님처럼 되기 원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그리스도를, 부활의 능력을 알고 있습니까?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까? 그리하여 정말 주님을 본받기 원합니까?

저는 노랗게, 빨갛게, 갈색으로 변하는 나뭇잎이 떨어지는 이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하여, 제 자신을 비롯하여 여러분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변하여 더 예수님을 본받는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온갖 고난 가운데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였던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기 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6, 8-11)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으심 말입니다. 그리고 의에 대하여 살으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늘 나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여기 ‘여긴다’는 말이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헬라어 원어에 의하면 마치 은행에 백만불이 넘는 돈이 있는데, 그것을 잊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은행에 많은 돈이 있으면 있는 줄 여기고 꺼내어 잘 살아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줄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본받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려고 하면 고난이 찾아옵니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에 참예함을 알기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11절을 다시 보면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하였습니다. 물론 미래의 부활을 말하고 있지만, 현재적으로 적용하자면 바울은 우리 믿는 자들의 육신이 죽어 있다고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감정이나 의지, 심지어 사랑마저도 육신적인 것은 죽어 있음을 압니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육신의 유혹과 정욕을 벗어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우리가 죄성을 지닌 몸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 유혹과 정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육체의 욕구와 싸우고 훈련하는(discipline) 과정을 통하여 우리 몸이 훈련될 수 있습니다. 그로써 상당한 수준까지 육체의 욕망을 죽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때에 다른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주님을 닮기 위하여, 주께 나를 드리기 위하여 내 삶을 포기하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지만 나를 포기할수록 엄청난 성령의 능력,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활의 능력이라고 한 것입니다.
TV나 Video, 인터넷을 많이 보는 사람은 하루도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TV Remote Control 을 찾아 누르게 됩니다. 아니면 컴퓨터를 키게 됩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TV나 Video를, 인터넷을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으며 자신을 합리화 합니다. 이것은 이미 중독이 된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얼마나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절하-8절)고 하였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길들여지기만, 절제되기만 하면 성령의 능력은 얼마든지 우리 안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지속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빨리 기쁨이 사라집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아를, 육체를 죽이는 훈련을 하는데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데에 힘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며 살기 위하여서는 먼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훈련의 첫걸음입니다.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에베소교회 교인들은 그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기에 열심히 일은 하는 것 같았지만 주님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 첫 사랑의 환희와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주께 매달리고 헌신했던 시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주시는데, 우리가 멀리 떠나 있었다면 다시 그 사랑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다리시던 주님께서 멀리 하십니다.
정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스케줄에 맞추시며 우리를 억지로 붙들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어찌하든지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변할 수, 본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새벽에 교제가 있고, 개인적인 말씀과 기도의 교제가 있고, 예배들을 통한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부활의 권능을,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자주 만나고 가까이 있어야 사랑이 깊어질 것이 아닙니까? 그런 교제가 없기 때문에 첫 사랑을 유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깊어지기는커녕 첫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체험하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가까이서 교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 34:10) 하였습니다. 다윗도 그렇게 늘 주님을 가까이 하면서 찬양을 드리고 살았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을 들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면 모든 것이 잘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도 잘 보이고, 주님의 뜻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많이 하고 싶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기도를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찬송을 많이 하고 싶습니까? 마찬가지로 찬송을 많이 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십시오. 찬송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싶습니까?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과 가까이 하십시오. 많이 읽게 됩니다. 독서를 많이 하고 싶습니까? 독서의 대가와 가까이 하십시오.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와 가까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가까이 하면 주님을 닮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은 죽고, 주님께서 사시는 것처럼 살 수 있습니다.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한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주님 옆에 가까이 있으면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끔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우리가 자꾸 멀리 가니까 가까이 오게 하기 위하여서 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편하면, 부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대로 가면 안 되는 줄 아시고 어려움을 주셔서 주님을 붙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기 전에 주님을 붙들고 사는 자가 지혜로운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 주시는 위로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받습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할렐루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헌신예배인데 헌신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어떤 일이나 남을 위하여 자신의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변화를 위하여, 주님을 닮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바라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 닮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처음 사랑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그 크신 하나님 사랑을 얼마나 느끼고 있습니까? 예배 생활, 기도 생활, 경건의 시간 등이 어떠합니까? 예배 드리는 가운데도, 찬양을 부르는 가운데도, 말씀을 듣는 가운데도 혹시 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나중에 천국에서 다 주님 앞에 만날 형제 자매들인데, 한 가족인데 마치 불신자들처럼 그들을 비판하고 흉보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을 의역하면, ‘나는 주님을 더 알기로 작정하였다. 주님과 함께 차츰 교제하는 시간을 더해 가며 더 깊은 교제를 갖겠다. 주님의 성품을 더욱 이해하고 인정하며 더 분명하게, 더 많이 교제를 갖겠다. 그래서 내 자신이 변화를 받아가며 주님께서 죽으심을 본받아 내 자신을 부인하여 그 놀라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결심, 결단이기를 바랍니다.
이는 분명히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는 바이기에 무척 기뻐하시고 많은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며, 은혜를 베푸실 줄로 믿습니다. 마치 육신의 자녀가 아버지 자신의 좋은 성품과 태도를 닮을 때에 기쁨과 즐거움을, 자녀를 키우는 보람을 뿌듯하게 느끼며 살듯이 말입니다. ‘주님! 주의 죽으심을 본받게 하소서!’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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