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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8-05-07 (월) 07:3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44    
믿음은(히 11:1-3)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입니다. 믿음을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란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였는가를 통하여 믿음의 본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본문을 통하여 다시금 깨닫고 더욱 확실한 믿음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믿음은 빛과 공기처럼 소중합니다. 빛과 공기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지만 모든 생명을 살리고, 모든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처럼 믿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선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assurance, reality)”이라고 합니다. ‘실상’은 ‘아래에서 받혀 준다’는 뜻입니다. 근거, 확신, 실체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가올 메시아를 약속하시며, 저들의 죄를 사하여 줄 구속자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은 비록 희미하고 불완전한 것 같은 그런 약속들을 믿었습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처럼 빛 되신 예수님의 비췸이나 많은 말씀을 대하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두고 신뢰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소망 안에 사는 것입니다. 바라는 약속들이 실제로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들은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약속이라도 하나님을 믿기에 확신하였습니다.
   즉 믿음은 불확실한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라고 막연히 동경하는 바램(wish)이 아닙니다. 추상적 개념이나 자기 신념 혹은 적극적인 사고방식도 아닙니다. 참 믿음은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실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절대적 확신(assurance)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부인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혀 그 음성을 들어보지 못한, 보지도 못한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연적인, 육체적인 반응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지는 것만을 믿지만 우리는 그런 감각(五感)보다 더 믿을만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감각은 거짓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딛 1:2).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고 믿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certainty, conviction, evidence)”라고 하였습니다. 즉 보여야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보이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을 믿기에 비록 보이지 않아도 내 속에 확신한 것들이 바깥으로 표현되는 반응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삶이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사는 것이 실생활에 나타남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믿음에 따르는 구체적인 행동, 그 증거를 나타냅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2절)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삶입니다(히 12:7). 노아는 진실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한심한 삶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비를 내리시겠다고 하였을 때에 노아의 머리에는 전혀 비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홍수가 있기 전에 그 땅에 비가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 비가 필요 없었습니다. 배가 없었기에 어떻게 배를 만들어야 하는지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엄청나게 큰 배를 말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바라는 것의 실상과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를 가졌습니다. 비를 내리실 것과 하나님의 계획이 배를 만들어 자신의 가족들과 동물들 한 쌍씩을 구할 것이 마음 속에 확신을 들자, 실제 행동으로 그 증거를 보였습니다. 120년 동안 말입니다. 참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은 그가 본 것이나 경험한 것에 기초하지 않고, 말씀에 기초하였습니다.
   불신자들, 자연인들은 이런 영적인 믿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유는 다섯 가지 감각 외에 있어야 할 여섯 번째 영적인 감각(The Sixth Sense)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니 영적인 감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더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의 실재를 믿지 못합니다. 마치 소경이 한번도 빛을 본 적이 없기에 빛을 믿기를 거부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에게는 사물이나 사실에 관하여 믿음이 있어서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삽니다. 물을 마시는 것도,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급료를 받는 것도, 병원을 찾아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도, 약을 먹는 것도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다 믿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믿음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엡 2:8). 그래서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300-400년 동안 세상의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이, 사상가들이, 과학자들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는 성경을 부인하며 자기들 나름대로 여러 이론들을 주장하였습니까? 칸트의 성운론(星雲論, nebula theory), 지각변동론(tidal theory),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super dense(big bang) theory등으로 이어져 오면서 다윈의 진화론도 등장하였습니다. 그 어떤 이론도 과학자들 사이에 모두다 동의하는 진리로 받아들여진 적은 없습니다. 하나의 이론으로 그칠 뿐이었습니다. 생명의 근원도, 우주의 생성 근원도 인간의 지식과 연구로는 한계가 있음을 증명합니다. 신시내티 대학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T. L. Moore 교수는 “To talk of the evolution of thought from sea slime to amoeba, from amoeba to a self-conscious thinking man, means nothing. It is the easy solution of a thoughtless brain.” (바다 점액에서 아메바로, 아메바에서 스스로 지각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적 생각을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지각 없는 머리의 쉬운 해답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강조합니다. 즉 모든 세상의 피조물은 하나님이 원인이며 결과며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미 있었던 물건을 가지고 무슨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입니다. 또한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표현은 이 창조주 하나님은 인격자라는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어느 인격체와 소통(설명)하는 방법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인격체에게 하는 하나의 의사소통이며 발언하시는 이도 인격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다른 신들처럼 우리 하나님을 인격이 없는 하나의 힘으로,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로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타난 것, 보이는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무엇을 하기 원하시며, 어떻게 하시려고 하는가를 알게 하므로 그 결과들을 하나님 안에서 다 보는 것입니다. 인격 안에서 확인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믿음은 인격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요, 지금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확신(신념)을 갖고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보고 그 분이 하실 것이라고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8-9)라고 하였습니다. 당대에 아브라함만한 갑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현재 안주하고 있는 땅을 떠나라고 하시면서 네가 앞으로 받을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나갔고, 이방사람처럼 약속하신 땅에 살면서 자식들과 함께 거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을 텐데 약속의 말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2-3)는 말씀을 믿고 바라보고 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고 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은 안 보여도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이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의 현실적인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모든 고난을 감수했다라는 것입니다. 고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의 책임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책임이 요구될 때는 믿음이 인격과 인격의 관계여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우리의 인격의 관계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하여 기대를 하고 설득을 하고 신뢰를 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 다른 한 쪽의 조작과 조정에 의한 대상이 아니기에 상대방의 의지와 결정에 대하여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여도 좋은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은 사실 확인이나 물질 확인, 결과 확인이 아니고 인격 안에서의 확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인격적 관계에서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시험이 닥칠 때에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책임지고 극복하고 이기기를 바라시지, 하나님이 우리를 조종하는 것은 절대로 안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절대주권자인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며,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시며, 그가 어떻게 약속을 지키신 신실한 분인가, 어떻게 믿을만한 분인가를 가르쳐 주셔서 알게 하시며, 모든 역사와 인생들의 각각의 생애 경험을 통하여 확인시키고 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순종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즉 우리의 책임을 요구하기 전에 믿어도 될만한 하나님으로서의 증거와 근거를 제시하십니다. 그런 확인을 통하여 믿음이 더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을 나타내시고 우리를 설득하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는 과정이 없이는 참 믿음이 더해갈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주문이나 외우며, 내 생각과 선택을 포기하고 스스로 옭아매는 것 같은 행위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비교하고 확인한 후에 ‘하나님, 당신만이 하나님이십니다. 당신 만이 저의 사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는 고백을 받아내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말에 순종하며 살겠니 아니면 세상 말을 따르겠느냐?’ 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은 우리 마음대로 세상적으로 살게 두시다가 당장 좋아 보이고 당장 행복해 보이는 것을 하게 내어버려 두십니다. 그런 가운데 긴 영적 싸움을 통하여 드디어 우리가 세상의 그 무엇을 갖고 와도 ‘싫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택하겠습니다’로 변화하는 것이 믿음이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가도록 우리 하나님은 기다리시며, 우리를 납득하시어 여백을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해보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더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깊은 신앙으로, 더 온전한 신앙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 우리는 아직 훈련되지 않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어떤 부족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너무 당황하지 마십시오. 기도 한번 해서 고쳐질 일이라고 기대해서도 안됩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꾸준한 교제와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도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으로 인해 결실을 맺게 됩니다. 참 믿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을까’ 하는 것보다 ‘어떻게 살까’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확신하며 믿음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인격적인 교제를 통하여, 말씀과 영적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쳐서 믿음이 더해가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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