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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8-06-04 (월) 08:4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30    
참된 예배를 드리는 믿음



1890년 26살의 나이로 우리나라 선교사로 들어와 46년을 선교하면서 최초의 평양신학교와 장대현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평양 숭실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마포삼열(Samuel Moffett) 선교사의 장남이었던 James Moffett 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죽음은 결코 의인의 삶의 마지막 단어가 아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그가 의인이었던 아니었든 무엇인가 남기고 떠난다. 어쩌면 그가 남긴 것이 암세포나 독처럼 퍼지기도 하고, 아니면 향기로운 냄새나 주위에 축복의 아름다운 열매를 남긴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서 끝나지 않습니다. ‘죽어서도 말한다’는 격언이 있듯이 그의 후손들이나 그 주위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죽어 잠잠한 것 같아도 듣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무슨 말을 남길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장인 11장에 들어와 우선 믿음의 정의(definition)를 내렸습니다(1-3절). 무엇이 믿음인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믿음이란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절)라고 한 것처럼, 인격자이신 성경의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약속의 말씀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요, 지금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확신(신념)을 갖고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4절 이하에서는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째로, 믿음의 영웅 아벨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4절)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창세기 4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들이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창 4:1-2). 형 가인은 자라서 농사를 짓는 자가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3-5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잘 살펴보며 묵상하면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인격적인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죄인들인 가인과 아벨에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어디서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분명히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제사를 드렸지 그렇지 않으면 제사를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인에게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린 장소는 맞았던 것 같은데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드린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제물이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려야 하는 것을 농사를 지은 곡식으로 드렸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합니다만, 저는 제물의 종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제사 제물들 가운데 분명히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인, 소제(grain offerings)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제물의 종류보다도 마음입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온전한 마음과 순종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잘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 자신입니다. 마음입니다. 아벨은 자신을 드렸습니다. 온전한 마음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을 드리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드린 제물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더 나은 제사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와 그들이 드리는 제사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가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 지지 않고 아벨의 것은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하며 얼굴이 변했다고 합니다.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을 대등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맞먹으려고 한 것입니다. 만약 가인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제물을 드리지 않아 열납되지 않았을 때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회개하였더라면, 그리고 다시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드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그는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불순종하며 하나님께 화를 낸 것입니다. 동생을 살인까지 하게 되었고요. 그 결과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창 4:16)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사탄 마귀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2)고 하였고, 사도 유다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켜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라고, 역사상 멸망 당하는 대표적인 사람들 중 하나로 가인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아벨이 올바른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벨이 의인이었기 때문에 올바른 제사를 드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올바른 제사를 드렸기에 의로운 자라고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신의 마음을 드렸고, 제사 제물을 드렸던 것 때문에 의로운 자는 증거를 얻은 것입니다. 즉 믿음이 있다면 내 뜻대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첫 순교자가 되어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4절하)고 한 것입니다. 반면 아벨을 살인한 후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라고 대답하자,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으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0절) 하시며,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1-12절)고 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 땅이 가인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비록 형의 손에 죽었어도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 23:35)고 하셨습니다. 유대 역사의 첫 순교자와 마지막 순교자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 더 강하게 역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도 아벨의 피가 흐르는 믿음으로 살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입은 자답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자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미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 2:4, 롬 1:17, 갈 3:11, 히 10:38)고 여러 번 성경에서 말하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최초로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 참된 예배를 드린 아벨을 통하여 만약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자신의 생각과 뜻,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과 뜻, 방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마음을 먼저 드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지 않은 예배는 비록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어떻게 드립니까? 어떤 마음으로 드립니까?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찝찝하고 벌 받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드립니까? 하나님께 잠시 인사 드리듯이 매주일 예배는 드려야 하니까 그냥 타성적으로,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피상적으로 예배를 ‘보고’ 갑니까? 아니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나님과 관계 없이 내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에 와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반복적으로 또 죄를 지었으니 좀 봐달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까? 그런 분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정말 한 주간 동안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고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며,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고, 전도하고, 섬기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살다가 와서 예배를 드리십니까? 아마 그러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고개 숙여 기도하는 순간 눈물이 날 것입니다. 찬양을 부르는 가운데 감격이 넘칠 것입니다. ‘주님 내 마음을 드립니다. 이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사랑합니다’ 고백하며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공적 예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족장시대부터 신약교회까지 하나님 백성들의 축복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나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후로 진리를 외치는 설교자들과 예배 공동체가 세워 지고, 사탄 마귀의 온갖 공격 속에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필요한 큰 능력을 예배를 통하여 받았습니다. 이 땅에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교회를 통하여 받았습니다. 이 축복의 땅 미국을 세운 청교도들은 더욱 그렇게 예배함으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John Owen 의 친구였던 청교도 목사 David Clarkson 은 “공적 예배에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살아난다. 예배를 통하여 병든 영혼이 치유를 받고, 사탄 마귀가 물러가는 것을 본다. 물론 하나님께서 공적 예배에서만 이 일을 행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적인 예배는 주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는 유일하고 정상적인 도구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적 예배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만약 주님의 몸인 교회로 모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벨과 같은 믿음으로 예배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신령과 진리로 예배한다면(요 4:23-24), 온 마음을 다 드리면서 예배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예배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엄청난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로 모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 죄를 덮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세상적인 자랑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만을 붙들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배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 안에서 내가 살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예배와 생활이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평소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생활을 하고서 예배 드리러 오면 예배가 어색하고 강대상이 멀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 내내 쓸데없는 염려와 잡생각에 빠져 있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한 주간 동안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고서 예배에 임하면 예배 시작부터 찬송에 힘이 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꾸려고 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친히 만나주시는 참된 예배입니다. 내가 변화 받는 예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삽니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기적을 체험합니다. 아벨과 같이 믿음으로 참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죽어서도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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