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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8-06-18 (월) 06:5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70    
하나님 아버지를 닮는 아버지(눅 15:11-32)



하나님 아버지를 닮는 아버지(눅 15:11-32)
아기가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는 인간은 그냥 그대로 두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는커녕 타락한 인간, 혹은 짐승처럼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성교육이 필요합니다. 육체적인 성장과 아울러 성숙한 인격자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부모의 영향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좋은 스승이나 친구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부모의 영향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도 자식을 낳는다고 해서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로서 자녀를 올바로 사랑하려면 한 인간으로서 성숙해짐으로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어 가야 합니다. 성숙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인생의 목적, 그 의미를 깨닫고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여 주위 사람들과 덕스러운 관계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아버지 주일이라서 우리 아버지들의 수고로 자녀들에게 대접을 받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아버지 상(image)을 갖고 있는지,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모습이 있는지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물론 우리 아버지들이 불완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버지와 비슷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를 인간 아버지에 대한 경험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종종 탕자의 비유로 일컬어지는 본문입니다(눅 15:11-32).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다음에 나오는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탕자인 둘째 아들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할 수도 있고, 어쩌면 둘째 아들보다 더 악한 첫째 아들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Father’s Day 를 맞아 하나님을 비유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집을 나가 살 테니 재산의 반을 달라고 합니다(12절). 당시 유대관습에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것은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얼른 죽어버리라는 암시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산도 두 아들이 있으면 큰 아들이 2/3, 작은 아들이 1/3로 분배하여야 했습니다(신 21:17). 그런데 아버지는 반을 준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 재산의 반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여 재산을 다 허비하고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며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13-15절).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으며 끼니를 이어가는데 나중엔 그것조차 주는 이가 없습니다. 참으로 비참하게 된 것입니다.
이 아들은 그 때 아버지와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17절). 그래서 지은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아들로 생각해주지 않고 그저 품꾼으로 생각해주기만 해도 감사하겠다는 마음으로 말입니다(19절). 그래서 돌아가는데, 이미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날부터 언제나 아들이 돌아올까 생각하며 늘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이 날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불쌍히 여기고 반갑게 맞으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20절). 뿐만 아니라 종들을 시켜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게 합니다(22절). 아들의 자격을,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잔치를 베풉니다. 이웃들을 초대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고 먹고 즐깁니다(23절). 이유는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다가 찾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이 세상 육신의 아버지들과 다른 것을 봅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우리 아버지들이 닮아야 할 이상적인 아버지 상입니다.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를 존중합니다. 한 인격체로 대합니다. 자녀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의 주장을 그냥 막 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비록 잘못된 것임을 알아도 말입니다. 이 아들이 컸다고 자신과 함께 할 마음이 전혀 없고 집을 떠나기를 원할 때에 떠나 보냅니다. 몹쓸 자식의 말도 안되는 요구도 들어줍니다. 자녀의 의사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비인격적으로, 억지로, 물리적으로 붙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이렇게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합니다. 내 소유가 아닙니다. 나의 자녀들도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 동안 믿음으로 키웠다면, 말씀과 기도로 키웠다면 내가 보기에 아무리 잘못된 결정을 하고 나간다 하더라도 허락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깨닫고 돌아옵니다. 아니면 내가 잘못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인생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보낸 주는 일의 연속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떠나 보냅니다. 여전히 사랑하지만 누구도 붙들어 놓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녀들을, 때로는 부모님을, 때로는 아내나 남편을 보내고도 외로워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만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하나님 사랑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사람은, 하나님 사랑이 깊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잘 떠나 보내지 못합니다. 너무 외로워하고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소망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사랑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는 참고 기다려 줍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가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재산을 반을 달라고 할 때 이미 이 아들이 어떻게 되리라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마냥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오늘날 우리 아버지들과 많이 다르지요.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방법대로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녀에게 올바른 인성교육을 시키지 못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떠나는 자식을 향해 이 ‘호로 자식 같은 놈아 너는 이제 내 아들 아니다’ 하면서 포기하지 않습니까? 잊고 살지 않습니까? 내게는 큰 아들이 있으니까 이 아들만 생각하고 살겠다면서 말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는 참된 아버지는 기다려 줍니다.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말입니다. 아들이 고생할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셋째로, 하나님 아버지는 잘 용서합니다. 너무 사랑하기에 말입니다.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재산을 달라고 하였던 아들입니다. 자신이 큰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소문이 다 나서 창피하기가 말이 아닙니다.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합니다. 용납합니다. 아버지에게 죄 용서를 빌며 돌아온 아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기에 기뻐하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죄 사함을 빌기도 전에 이미 용서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많은 재산을 아깝게 여기며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돼지를 치다가 온 더러운 몰골을 보고도 껴안았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봐달라는 아들에게 신분을 회복시켜주며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면서 실제로 용서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버림 받는 죄인들의 친구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얼마나 잘 용서합니까? 용서를 받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잘못은 가르쳐주어야 하지만, 잘못을 시인하면 얼마든지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아니 잘못을 시인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용서하는 마음을 품어야 진짜 사랑이지요.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25절 이하의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서론에서 언급하였듯이 작은 아들보다 더 못되게 굴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이웃까지 초청하여 온 가족에게 잔치를 열었는데 큰 아들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28절). 오히려 화를 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간청합니다. 더욱이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종과 주인의 관계로 전락시키며 자신은 종처럼 일해도 아버지가 자신을 즐겁게 해준 일이 없는데, 탕자인 동생은 집안에 엄청난 피해를 주고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잔치를 베푼다고 아버지를 비난합니다(29-30절). 자기는 아버지를 위하여 일을 열심히 했기에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지만, 동생은 아들의 지위를 버렸으니까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버지가 아들의 지위, 명예를 회복해주어도 말입니다. 완전히 아버지에게 반기를 드는, 반역하는 행동입니다.
그래도 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반응을 보십시오. “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절)라고 하였습니다.
큰 아들의 모욕적인 말과 못된 행동에 대해서도 참으시면서 그를 인격적으로 설득하려고 하는 아버지입니다. 자기에게 불순종하며 거역하는 큰 아들도 엄청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가족이 갈라지는 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가족은 하나다. 우리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지 너무나도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 깊고도 넓고도 길고도 높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구하노라”(엡 3:17-19)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들이여!
물론 이 세상에 하나님 아버지와 똑 같은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나 큰 아들과 같은 자식은 많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을 우리에게 남겨준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임을 보여주며, 이 세상의 수 많은 자녀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하나님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버지가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어야 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모습의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아버지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아버지만이 할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해본 사람만이 못된 자식들이라도 그 존재자체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격적인 하나님으로부터 설득을 당해본 아버지 만이 자녀들에게 인격적으로 대하며 존중할 수 있습니다. 참고 기다려줄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다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들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은혜가 넘쳐서 하나님 아버지를 닮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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