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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02-25 (월) 07:1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63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눅 3:1-6)


지혜로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먼저 준비를 합니다. 준비가 없이 무슨 일을 하면 그 일이 제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계획을 하고 잘 준비해서 일을 하면 대체로 결과가 좋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character)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계획이 없이, 준비가 없이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속 사역을 펼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계획을 하셨고, 때가 되어 준비를 하신 후에 그 사역을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세례 요한이 메시아의 사역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선 사도 누가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 지도자들을 열거합니다.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레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1절)라고 먼저 정치적 상황을 설명합니다. 누가는 세계 역사 속에 복음이 단순히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고 온 민족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언급합니다. 로마 아구스도(Augustus) 황제 뒤를 이은 디베료(Tiberius) 황제는 주후 14년부터 37년까지 로마를 다스렸습니다. 말년에 로마 원로원과의 불화로 카프리 섬에서 살다가 주후 37년에 죽고 맙니다. 예수님은 디베료 황제가 아닌 그 아래서 유대 총독으로 일하던 본디오 빌라도와 부딪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사역한 곳은 유대가 아닌 베뢰아였습니다. 그 지역은 주전 4년부터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가 갈릴리 지역과 함께 분봉왕으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에돔이 멸망하고 등장한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자신의 이복동생(Herod Aristotubulus)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했습니다. 이 불법적인 결혼을 비난하고 책망한 세례 요한은 헤롯 안디바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감옥에 갇힌 후(20절; 마 14:3-4) 헤로디아의 모략에 의해 순교하게 됩니다(마 14:6-10).
헤롯 빌립(Herod Phillip)은 헤롯 대왕의 또 다른 아들로 이두레와 바타나, 드라고닛 지역을 물려받아 주전 4년에서 주후 34년까지 다스렸습니다. 그가 유명한 가이사랴 빌립보 성을 건설하였습니다. 루사니아(Lysanias)는 다메섹 서쪽에 있는 아빌레네를 다스렸습니다만, 그에 관한 역사적인 정보는 그리 많이 없습니다. 누가는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를 언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편, 당시 종교적인 상황을 “안나스와 가야바가 데제사장으로 있을 때”(2절상)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 또 하나의 권력자들로 유대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안나스는 주후 6년경 구레뇨 수리아 총독이 그를 예루살렘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후 주후 15년에 물러나고, 그의 사위 가야바(요 18:13)가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나스는 직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예수님과 초대교회를 대적하였습니다. 가야바는 예수님이 그 민족을 위해 죽으실 것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요 11:47-53). 그는 빌라도를 거스리지 않으면서 로마 당국자들과 긴밀히 협력하였습니다. 바로 그가 예수님께서 진노하신 성전 안에서 물품을 파는 것을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종교적 상황 속에 말라기 이후로 400년 동안의 암흑기를 지나 옛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오한에게 임한지라”(2절하)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단강 서쪽 황량한 빈 들에서 세례 요한을 사용하셔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3절)라고 하였습니다. 400년 만에 광야에 등장한 선지자에게로 사람들은 몰려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박식한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의 말보다 이 광야에서 외치는 고독한 설교자의 메시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막 1:15)는 외침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누가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제 메시아, 그리스도가 곧 오기에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요구하시는 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는 심령은 천국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로부터 이러한 말씀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400년 동안 자신들을 육적인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메시아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기쁨과 위로의 메시지를 외치는 선지자의 소리가 아니라, 경고와 죄를 꾸짖는 선지자의 메시지를 좋아할 수 없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외침은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나 세상과의 타협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에는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물로 씻음을 받는 결례식의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왜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세례 요한은 그들의 심령이, 영혼이 씻김을 받기 원했습니다. 유대인들도 죄인임을 인정하고 지은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 지은 죄를 시인하고 그 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도 회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나름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신앙적인 위선을 버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바울이 “대저 표면적(outwardly)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inwardly)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죄 용서함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들로부터 돌아서야 주어지는 것이기에 세례 요한은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고 명령하였듯이 말입니다. 회개란 죄의 결과를 가지고 슬퍼하며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은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통회하는 것이 분명히 회개에 포함되지만, 그 슬픔이나 후회가 생각이나 마음, 행실을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죄에 대한 슬픔이 진정한 회개로 이어졌다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sorrow)입니다(고후 7:9-10). 그래서 오히려 ‘회심하다(convert)’의 의미가 강합니다. 죄를 향하던 마음이, 삶이 방향을 180도 바꾸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세례(Baptism)’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롬 6:3-10).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가 진짜입니다(16절). 요한의 세례는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자격이 주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요한의 역할은 성령세례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이 주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도록 준비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세례 요한의 사역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임을 말합니다. 즉 세례 요한은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죄 사함의 회개를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4-6절; 사 40:3-5)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험한 골짜기와 사막을 통과하여 돌아오는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건져주심을 상징하는 귀환의 길을 준비하듯이, 세례 요한이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후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함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라고 외쳤듯이,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진다는 표현은 그들의 불의하고 교만한 마음이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고 겸손하여 지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외치는 회개의 세례는 구약의 바벨론 포로들의 귀환과 같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와는 달리 메마른 사막이나 골짜기나 높은 산이나 험한 길을 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는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히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렸다고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볼 준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모든 육체, 모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이미 그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다가,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말씀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신 후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아니 곧 다시 오셔서 정말 눈으로 보이는 하나님 나라가 펼쳐질 것이며, 세상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회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시의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종교인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살펴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의 초점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심령을 청결케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그들에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얼마든지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까? 주위를 바라 보십시오.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하였습니까? 그것은 이제 교회 안에까지 파고 들어오지 않습니까? 우리도 회개하여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한번 회개했다고, 회심했다고 자만하지 마시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고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물론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는 세례 요한처럼 외치셔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초림을 예비하였지만,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여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을 모르거나, 알아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외쳐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고, 회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무시무시한 심판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복음을 전하는데 무슨 외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적인 능력을 갖추고 난 후에 하겠다고 미루십니까? 세례 요한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 3:4)고 하였습니다. 별로 가진 것이 없었던 그였습니다. 당시 낙타의 털옷은 가공되지 않은 정말 단순한 옷이며, 메뚜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었고, 석청은 일종의 야생꿀(wild honey)입니다. 그 모습은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와 비슷하였습니다(왕하 1:8).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물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 그렇게 미개한 생활을 하며 세례 요한처럼 지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방식은 철저하게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철저하게 하나님을 중심하고 살면서, 주님 다시 오심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뭇 심령들이 회개하고 구원 받아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외쳐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죄 사함을 받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회심하지 못하셨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살아계십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아니 말씀하신 대로 곧 다시 오십니다. 여러분의 죄를 위한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를 깨끗이 해결하십시오. 돌아서십시오. 진실로 회개하여 죄 사함의 축복을 체험하며 정말 변화된 삶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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