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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09-09 (월) 06:4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003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된 후에는 (눅 5:33-39)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자신이 죄인인 줄로 깨닫는 택자들을 위함이지,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31-32절).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을 아는 사람이라야 영혼을 고치시는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옮겨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죄가 없다고 생각하며 아무 문제가 없어서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교만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하여 오신 주님이셨습니다. 형식적인 제사보다 긍휼, 사랑을 원하신 주님이셨습니다. 그 당시의 열심 있는 종교인들이었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겸손이나, 회개, 용서의 개념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예식(ceremony), 자만(pride), 남에게 보이는 것(display)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나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금식문제를 가지고 묻습니다(마 9:14).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진지한 태도로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33절). 그 때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은 빛이 아니고,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고 하였고(요 1:6), 주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였습니다(요 1:27).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라고 하였고(마 3:3), 자기는 신랑이 아니고 신랑의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요 3: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유대의 전통이나 의식을 따르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사실상 율법에 의하면 금식하는 날은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the Day of Atonement)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에스더로 말미암아 생긴 부림절을 포함하여도 일년에 두 번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정통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일주일에 이틀을 물도 마시지 않는 금식을 하면서 남들 앞에 초췌한 모습을 보이면서 아주 신앙 있는 종교인으로 행세하였던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포함되지 않은 외식적이고 진실하지 못한 종교생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마 6:16)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가난한 사람이 부한 체하면 가난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무식한 사람이 아는 체하면 오랫동안 무식하게 되고 결국 사람을 잡게 됩니다. 괴로운 일들입니다. 그런데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체하시면 훨씬 더 위험한 일입니다. 신앙이 생길 수 없습니다. 나중에 영원히 후회하게 됩니다. 부한 척하는 거나 아는 척하는 것이야 자신은 적당히 넘어가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일지 몰라도, 믿는 체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엄청난 피해가 옵니다. 자기 기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심판을 받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참된 성도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의식주의나 형식주의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가장된 외식주의자도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 새사람이 된 후에는 새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옛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5)라고 한 것처럼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주의의 종교예식에 대한, 금식문제에 대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세 가지의 비유로 대답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옛 삶의 모양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새 삶의 모양과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34-35절)고 하셨습니다. 비유의 말씀입니다. ‘혼인집 손님들’은 신랑의 친구들을 뜻합니다. 당시에 유대인 결혼예식이 보통 일주일간 계속되는 데, 그 일주일 동안의 모든 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친구되는 신랑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신랑과 함께 노래하며 춤추며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혼인 잔치에서 신랑의 친구들이 슬퍼하며 금식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지요.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미 오셔서 함께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습관적인 금식은 불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꾸짖고 계십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사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변화 받은 성도의 삶은 혼인 잔치 자리처럼 축제의, 기쁨의 삶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도 전통에 얽매이거나 형식적인, 습관적인 신앙생활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영적인 큰 근심과 필요에 의한 금식이 아니고 습관적인 금식이라면 그 금식은 전혀 의미 없는 종교 의식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주일에 교회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 외식적입니다. 전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남이 없는 찬양,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찬송은 예배를 드리는 척하는 것이지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어 변화 받은 성도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 그런 예배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런 금식이나 어떤 종교예식도 받지 않으십니다. 성수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적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주의, 율법주의의 개념으로의 성수주일이 아닙니다. 하루를 정말 주님과의 교제와 성도들과의 교제, 섬김을 위한 하루이어야 합니다. 평소에는 우리 자신을 위한 세상 일로 있기에, 온전히 못하기에 말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이제 곧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날,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는데 그 때 금식하라고 하십니다(35절). 다시 말씀드려서 금식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는 말입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 성도들과 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성령으로 부어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일주일에 며칠씩 꼭 금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형식적인, 의식적인 것이 아닌 자신이나, 가정, 교회, 나라를 위한, 내적인 영적 치유나 야곱과 같이 하나님과의 씨름하면서 간구하는 간절한 심령으로 금식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어진 시간에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며, 정말 자신과 가정, 교회, 나라를 위한 영적인, 진실한 염려로 회개하며 금식하며 기도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둘째는, 새 삶의 방식은 옛 삶의 방식과 연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36절)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옷은 모직이나 베 같은 섬유였다고 합니다. 그런 천으로 만든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서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새 옷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만약 낡은 옷에다가 새 옷 조각을 붙인다고 가정해 봅시다. 모양도 웃기지만, 한번 빨면 그 조각 때문에 더 차이가 나고 그 이음이 쉽게 헤어질 것입니다. 합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죄의 복음을, 은혜의 복음을 옛 유대주의 전통이나 의식에 덧붙일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연결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믿고 변화 받고 나서의 사고방식과 믿기 전의 사고방식이 연결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 받아 이미 변화 된 후에 자꾸 옛날 방식으로 생각하고 산다면, 타협하고 산다면 찢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게 새 조각을 찢어서 헌 옷에 붙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사시면 육신의 수치가, 죄성이 마구 드러나게 됩니다. 이미 변화 받은 성도의 새 삶은 옛 삶에 짜깁기하여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 삶이라면 우리는 다시 찢어지고 말 것입니다. 전혀 다른 삶입니다.
   
셋째로, 새 삶은 옛 삶을 포용할 수가 없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가 터뜨려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37-38절)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포도주는 요즈음처럼 병에 담지 않고 동물 가죽부대에 담았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포도주를 담아온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게 되면 부대가 터지는 것이 당연하지요.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포도주의 발효력 때문에 그 부대가 터져서 둘 다 버리게 됩니다. 새 부대는 신축성이 많고 탄력이 있어 그 포도주의 발효력의 압력을 받아도 손상이 없습니다.
참된 의를 담을 수 있는 삶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새 생명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의지할 때에, 새로 태어나서 참된 의로 인침을 받습니다. 그리고 새 삶을 삽니다. 옛 삶의 모습이나 형태가 사라집니다. 옛 삶의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새 삶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얽매이고 눌린 삶이 아니라,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은 기쁨의, 소망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이미 변화 받은 성도는 옛 삶의 모습과 형태를 포용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39절)고 하셨습니다.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앞에 언급한 세 가지 비유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새 교훈보다 옛 교훈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보다 율법이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포도주처럼 묵은 것에 맛들인 사람은 새 것을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종교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을 원하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그 맛에 길들여져 있어서 말입니다. 새 진리가 좋은 것을 느끼려면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믿지 못해 심령의 변화를 받지 못했기에 못 느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사실 모두 같은 내용의 말씀을 반복해서 하신 주님이십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주여 주여 하지만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유대주의 종교생활을 꾸짖고 계십니다(사 29:13, 마 7:21). 이러한 옛 유대의 전통을 고수하며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외식적인 신앙,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이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결이 불가능합니다.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담을 수도 없습니다. 좋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옛 삶의 방식이, 모양이, 태도가 새 삶의 방식이나 모양, 태도와 연결될 수도, 어울릴 수도, 담을 수도, 포용할 수도 없습니다. 삶의 원리, 사고방식이, 생각이 전혀 다른 새로운 것입니다. 새 부대이신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영적인 것, 내적인 것, 영원한 것, 참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고 이미 변화 받은 참된 성도의 증거들을 가르쳐 줍니다. 이미 변화 받은 성도는 첫째,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삶의 방식을 버립니다. 옛 삶의 형태나 방식을 버립니다. 그것이 썩어질 것이요, 새 것과 대조되는 것을 깨닫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고 하신 것은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겠느냐는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참된 성도는 계속하여 거룩한 삶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내적으로 개혁을 해 나갑니다. 낡은 것이 새 것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새 것은 옛 것의 도전을 받아 왔습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가 처음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지구가 둥글다고 이야기한 갈릴레오도,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말한 코페르니쿠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전통에 개혁을 요구하면서 칼빈과 함께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을 것을 외쳤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좋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초대 교회에도 복음은 두말할 필요 없이 많은 도전과 핍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물론 베드로, 스데반 집사, 바울 등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핍박을 하여도 그 안에는 생명이 있었기에 낡은 것이 이겨내지 못하고 그 복음은 얼마 안되어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우리 자신들도 과거, 옛 것에 얽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와 의식의 제도보다도, 구태의연한 습관적 종교생활보다도, 새로운 심령으로 생각이, 말이, 행동이, 습관이, 인격이 새 부대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겨야 합니다. 내적인 개혁이, 삶의 개혁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Transformation 되었습니다. 나비(butterfly)가 되기 전에 애벌레, 유충(caterpillar)으로의 과정을 거치는 것을 아십니까? 유충으로 얼마 동안 있다가 유충의 껍데기를 벗고 나비로 훨훨 날아다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죄로 둘러싸인 껍데기의 유충으로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벗어버리고 자유의 나비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삶이 좋다고 계속 유충으로 삶을 산다면 잘못되어도 아주 잘못된 것이지요. 나비가 된 후에는 유충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유충이 나비와 어울릴 수도 없고, 연결도 불가능하고, 담을 수도 없습니다. 나비는 나비답게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것에, 의식에, 위선적인 것에서,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주님과 함께 자유로이 날면서 은혜가운데 사는 것입니다(히 12:1).
유충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새 옷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지 마십시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지 마십시오.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이미 변화 받은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새롭게 하나님의 나비(God's butterfly)로 훨훨 날아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나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껍질을 벗겨낸 하나님께 속한 나비입니다. 각자 고유한 개성을 지닌 갖가지 무늬의 빨강 나비, 노란 나비, 파랑나비, 초록나비 등등.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훨훨 자유롭게 나는 하나님의 나비들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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