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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7-02-13 (화) 10:3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466    
[2/11/07] 주님을 본받게 하소서 5
주님을 본받게 하소서 5 (로마서 12:1)
2007년 새해를 맞아 저는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주님을 본받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올해부터는 주님을 본받아 자신을 죽이고 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 자아가 죽어야, 죄에 대하여 죽어야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내 이웃이 살고, 내 교회가 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본받는 데에 필요한 것이 훈련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적 훈련(spiritual discipline)이 없이는 우리 자신이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훈련 중에 가장 기초 훈련인 우리 삶을 단순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살아가신 삶을 생각하며 자주 내 삶과 비교하면서 조정할 것이 있으면 조정해야 한다, 내려 놓으셔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를 묶어 놓는 것들, 무거운 짐들, 얽매이기 쉬운 죄를, 불신앙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집착하는 것들을 내려 놓는, 포기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주님을 본받기 위하여 겸손의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겸손은 밑바닥으로 나를 낮추어서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를, 그 희생을 감사한다면 겸손이 자라게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훈련은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돌보실 줄로 믿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행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주님을 본받기 위하여 희생하는 훈련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지난 주일까지 말씀을 드린, 삶을 단순하게 하는 훈련, 경주하면서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는 훈련, 내려놓는 훈련, 겸손의 훈련 등이 귀중한 보석 같은 훈련이라면, 희생하는 훈련은 보석 중의 보석인 다이아몬드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희생은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사역이나 성품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정말 단순하게 사셨고, 무거운 것들을 다 내려놓고 경주하셨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다 비우고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세상의 구세주로서 다른 어떤 성인들과 구별된 것은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기까지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여러분께서 주님을 본받기 원한다면, 닮기 원한다면 희생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희생’이라 함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 1절에 그 뜻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여기 ‘권하다(plead, beg, urge)’의 뜻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쉽게, 자동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간절히 그들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실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내 욕구를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산 제사(living sacrifice)’가 되라는 것입니다. 옛날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죽어야 할 동물들을 성전에 가져오면 제단에 놓고 그 희생제물을 죽여 지성소에 피를 뿌리고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렸지만, 이제는 우리 몸이 살아있는 채로 희생제물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것이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산 순교자로 살아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순교자가 살아있습니까? 순교자, 희생제물이라는 것은 죽어야만 하는 것 아닙니까? 무슨 말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을, 우리 삶을 희생하며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죄에 대하여 죽고,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모든 것에 대하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fragrant offering)과 생축(sacrifice)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드렸다고 합니다. 제물은 선택의 의미가 깊고, 희생은 보다 더 나은 것을 위하여 무엇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선택하셔서 자신의 속죄의 희생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주님을 본받기 원하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선택하여 희생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본받기 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희생하라는 말인가? 희생하는 훈련을 위하여 우리 생활 가운데 세 영역에 적용을 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개인적인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 산상수훈 가운데 마태복음 6장 25-33절에서 주시는 교훈입니다. 우선 이 말씀은 이 세상의 것들을 더 가지려고 욕심내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26절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셨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인 희생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믿느냐는 선택에서 시작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누가 채우신다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것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재물을 쌓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대신에 재물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믿음이 어디서 나타납니까? 동서남북이 다 막히고, 계획했던 일들이 망가져서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가 아닙니까? 그 때에 염려하고, 근심하며 절망가운데 사는 사람은 적어도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재물을 믿고 있었는데 다 사라져 버리니 믿을 데가 없어진 것이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설교의 초점이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갖고 있는 것이 나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시 잘 읽어보십시오. 어디 예수님께서 믿는 사람들이 가난하기를 원한다고 합니까? 물론 12 사도들처럼 예수님께서 어떤 이들은 가난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기에 그렇게 두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대체로 그 자녀들이 풍족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풍성하게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지금 예수님의 설교 초점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갖고 있던 적게 갖고 있던, 우리가 좋은 것을 갖고 있던 없던 간에 우리는 그것들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소유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믿고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즉, 겸손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희생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믿고 의지할 데는 하나님 한분이라는 것에 확신이 있어야 내 자아가 죽는 희생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관계에 대한 희생입니다. 창세기 22장이 이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00세에 얻은 약속의 자녀 이삭을 포기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들을 통하여 바다의 모래와 같이, 밤하늘의 별들과 같이 자손을 축복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창 12장, 15장). 아마도 아브라함에게 노후에 얻은 아들 이삭은 그 삶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고 명하십니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입니까? 언제는 엄청난 약속을 해 주시고는, 지금 그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아마 밤새껏 잠을 못 잤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믿음의 조상이요 영웅이지만, 그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요구를 하셨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믿음이 있는 우리들처럼 아마 아브라함도 그의 우선순위와 믿음을 점검해 보았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음성은 분명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Sacrifice your son.”
아브라함은 밤새 고민하였는지 몰라도 그 다음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3-5절)! 눈여겨 보실 것은 사환에게 5절에서 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원어에 의하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아이와 함께 가서 예배를 드리고 우리가 돌어오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아이를 죽여서 제물로 드리고 나면 혼자 돌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데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고 합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아들 이삭도 믿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니면 이삭은 아버지를 믿었던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순수하게 결박을 당하고 제단에 누었지요. 아들에게 칼을 대려고 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창 22:12)고 하시고, 한 수양을 준비해 놓으셨던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자리까지 몰고 갔습니다만, 그는 ‘Lord, You’re more to me than any relationship ever will be. If You tell me to put the most important person in the world to me on an altar, I’ll sacrifice him.’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도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정말 문자적으로 내 부모와 처자와 형제, 자매, 내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관계들 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그런 관계까지 희생하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에 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그 사람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면 사실 여러분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더 잘 돌보신다는, 더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정말 안전하지,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안전합니까? 사실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것이 정말 안전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에게 지금 현재 관계를 맺고, 깊어져 가는 사람이 있을 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간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 사람이 우상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여러분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고 계속 관계를 지속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요구하실 것입니다. ‘나를 선택하고, 그 사람을 제물로 드려라!’ 비록 관계가 깨어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드리면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다 큰 자녀이든지, 남편이든지, 아내이든지, 부모이든지, 형제 자매이든지 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세요. 예수님께서도 백배로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막 10:29-30). 할렐루야!

셋째로, 물질에 대한 희생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개인적인 희생이 재물을 포함한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물질에 대한 희생은 돈이나 내 소유물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셋 중에 가장 쉬운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희생과 관계적인 희생을 잘 하는 사람이라면 물질에 대한 희생은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개인적인 보물들, 우상적인 관계들이 정리가 되면 돈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연보에 후하였기에 칭찬한 것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라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 4:15-18) 하였습니다. 15절에 오직 빌립보교회만 연보했다고 하며, 16절에는 반복해서 했다고 합니다. 또 18절에는 풍족하게 연보했다고 합니다. 이를 “향기로운 제물”로 표현한 것을 눈여겨 보십시오. 그 결과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반복해서 풍족하게 헌금을 하니, 하나님께서는 풍성하게 그들의 쓸 것을 채워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바꾸어 말하면 물질에 대한 희생에 인색하면, 헌금하는 데에 벌벌 떨면 하나님께서 풍성한대로 쓸 것을 채워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주님을 본받고자 하는 성도가 희생이 없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움켜쥐고 있다고 영원히 여러분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에쿠아도르 선교사 Jim Elliott 는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 not keep to gain what he can not lose’ 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본받으려는 우리에게 희생 좀 하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을 제물로,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도, 물질도 희생하는 훈련을 하라고 합니다. 한꺼번에 몽땅 다 바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면서 기다리십니다. 여러분 자신이 조금, one decision at a time, one day at a time,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으며 조금씩 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조금 희생하고 무슨 대가를 바라는 그런 희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희생이 있어야 많은 열매가 맺힌다고 하였습니다(요 12:24). 성령의 은혜로 여러분이 희생함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이웃과 우리 교회에 많은 열매들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계시며 오히려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실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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