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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8-03-24 (월) 08:5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440    
[3/23/08] 절망에서 소망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누가복음 24:13-35)
예수님께서 부활한 그 주의 첫날에,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의 무리와 함께 머물다가, 25리, 약 7마일 떨어진 엠마오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13절).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라고 18절에 말하고 있지만, 성경이 딱 한번 나오는 이름이요,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즉, 이 두 사람은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 가운데서 12 사도에 들지도 않는, 또한 사도 바울처럼 특별히 내세울만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방금 부활하신 주님께서 온전한 계시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3년간의 공생애 사역에서도 그러했듯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낮은 심령들, 평범한 심령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물론 그냥 아무렇게나 누구에게나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우선 주목할 것은 이 두 제자가 소망을 잃고 절망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희망이 해처럼 밝게 타오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는 동안은 주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왕의 왕이심을 믿었습니다. 정말 이 분만 따라가면 내 앞날이 보장되겠구나 믿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장사를 지낸 후에는 무겁고 막막한 어두움이 그들의 심령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안식 후 첫날 여자 몇이 급히 와서, 무덤이 비어있다는 소식을 전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눅 24:10-11). 하지만 무덤이 비었다는 말과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고 믿는 것은 그들에게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그 날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던 그들은 주님을 잃었다고 믿었고, 당연히 낙심하여 절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에게 주고 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다고 하였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리고 삶의 의욕이 전혀 없는, 기쁨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같이 우리 인생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슬픔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슬픔, 오랜 질병으로 인한 슬픔, 기대했던 인간관계에서 신뢰를 잃어버릴 때의 슬픔 등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과 다른 영적 슬픔이 있습니다. 주님이 안계다고 느낄 때,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느낄 때 말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전혀 응답이 없을 때, 성경을 읽거나 좋은 신앙 서적을 읽어도, 설교를 들어도 전혀 감동이 없을 때 주님의 제자들의 마음은 슬프게 되어 있습니다. 낙망이, 절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같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사는 분이 계십니까? 한때는 주님을 아주 생생하게 느꼈지만 지금은 살았다 하는 이름만 있을 뿐 마치 죽은 자와 같은 분이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품었던 소망을 다 잃어버린 분이 계십니까? 그런 때는 마치 우리 주님이 부활하지 않으시고 계속 무덤에 계신 것처럼, 주님께 둔 모든 소망이 조롱거리가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러분 중에 이런 영적 피폐함으로 힘들어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있다면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만나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온데 정녕 살아계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나기 원하신다면, 오늘 본문의 두 제자처럼 적어도 주님을 향한 갈망, 간절히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마음은 있어야 합니다. 14절을 보시면 이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는 도중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한 것처럼, 그들의 대화 주제는 온통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희망을 읽고, 기쁨을 잃었으나 주님을 향한 갈망은 잃지 않았습니다. 아직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았던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의 14절 어감을 보면 그들의 대화에는 열정과 열의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감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잃어버린 후에야 그들은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들 심령 속에는 지금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고자 하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에 19절부터 24절까지 그 동안 있어진 예수에 대하여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여러분들이 심령 깊은 곳에 그렇게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갈망이 있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어느 시편 기자는 절망 가운데서도 자기 자신 스스로에게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11)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기자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1절)라고 유명한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하나님께서 만나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두 제자들을 처음 만나 동행이 시작될 때에는 그들의 영안이 어두워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16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주님께서는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5-26절)고 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만 하는 필요성을 알지 못했고, 이 전에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의 꿈꾸던 것은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왕좌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27절).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비롯한 구약 성경의 계시를 풀어 주시는 설명을 듣자, 그들은 십자가의 큰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유월절 어린양, 광야의 놋뱀,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에 대하여 무슨 의미인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자기들이 혐오하던 십자가가 어떤 왕관보다 더 놀라운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어두워진 영혼에 빛이 비추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때였습니다(32절). 거의 엠마오 마을에 도착하였을 때 예수께서 더 가시려는 것을 보고 주님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먹을 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나자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28-31절). 자신들의 잘못되고 편협한 생각으로, 희망으로 말미암아 슬픔에 잠겨 있어서 눈이 멀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 하신 말씀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으니 바로 자신들 앞에 나타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무엇을 하고 계신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주님을 대접했을 때 축복의 감사 기도를 받을 때에 눈이 열려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늘 성경말씀이 깨달아질 때입니다. 사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표징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읽었던, 들었던 성경 말씀이 이상하게 우리를 사로 잡을 때, 그래서 마음이 뜨거워질 때입니다. 낙망하고 있을 때 어려운 환란을 만날 때 말씀에 약속하신 주님의 음성이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 같이 들릴 때, 정말 꿀송이 맛과 같을 때 부활하신 주님은 여러분 가까이 계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물론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주님을 그토록 만나기 원하는 심령들에게 중요한 기초적인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면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며, 나 스스로는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님을 보내셔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가 주님 안에서 죽고, 주님이 내 안에서 살게 되어 영원한 나라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신 줄을 몰랐지만, 사랑의 대접으로 떡을 드릴 때에 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함께 엠마오로 가는 길동무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으로 알아본 것은 그를 기꺼이 데려다가 함께 유하며 음식을 대접할 때였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손님을 대접한 것이 주의 사자임을 몰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손길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색하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참 사랑의 마음으로 대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축복의 감사 기도를 해 주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일상 생활 중에 늘 사소한 것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한 마디 말에, 따스한 눈 빛에 감동을 받으며 어느새 우리가 잃었던 사람이 다시 우리 곁에 와 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듯이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들인 우리에게 주님께서 다가와 만져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질병, 계속되는 시련, 신뢰했던 사람들에 대한 실망으로 낙심하고 있을 때라 하더라도 주님을 향한 가느다란 끈을 놓지 않는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변화를 받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비록 무슨 환상을 보지는 못해도, 평범한 식사와 평범한 대화 속에 감격에 젖어, “아!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어려분!
주님을 장사지내고,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엠마오로 돌아갔던 이 두 제자가 변화를 받고, 영의 눈이 떠져서 주님을 알아본 후, 비록 주님께서 즉시 저희를 떠나셨지만 그들은 소망을 되찾고,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33-34절) 하면서, 그 길에서 된 일과 떡을 떼시면서 자기들에게 알려진 일을 증거하였습니다(35절). 바로 이것이 주님을 만난 자들의 특징이지요. 주님을 만나본 결과를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을 실제로 만났으니 얼마나 확실한 증거를 하였겠습니까?
부활한 주님을 만난 사도들과 바울이 그렇게 복음을 전함으로 초대교회들이 탄생했고, 오늘날까지 주님을 만난 증인들의 증거로 말미암아 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을 슬프게 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낙망하게 합니까? 살아갈 의욕을 잃게 합니까? 기대했던 것들이 무너져서 그렇습니까? 계속되는 고통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래서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하나님은 너무나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됩니까? 생각과 마음가짐의 초점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그런 것들에 두지 마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두십시오.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오늘 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바로 이 자리에 영으로 함께 계신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을 갈망함이 있다면, 사모함이 있다면 만나 주실 것입니다. 이 자리를 떠나서도 만나주실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만나주시는 것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도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만 만나주시는 것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 중에 사소한 대화 속에 만나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사업체에서든, 홀로 있는 골방에서든, 운전할 때에든 만나주실 것입니다.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가슴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눈에 눈물이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인색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위에 주의 천사들이, 또 다른 주님의 모습을 한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사랑을 베풀 때 주께서 축복의 기도로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주시면서 변화를 체험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망이 가득찬 우리의 걸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확실한 소망의 증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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