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021,368
오늘방문 : 4388
어제방문 : 2757
전체글등록 : 3,841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07-20 (목) 10:44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349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마지막 재앙(계 15:1-8)
미래에 있을 이 세상의 종말을 계시하는 요한계시록은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본론이 큰 세 재앙이 기둥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기둥은 일곱 인을 떼는 재앙이며(6:1-8:5), 두 번째는 일곱 나팔 재앙이며(8:6-11:19), 세 번째는 일곱 대접의 재앙입니다(15:1-19:6). 어린 양이 인을 뗀 다는 것은 주님이 심판의 일을 시작한다는 의미이며, 나팔을 분다는 것은 경고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대접으로 쏟아 붓는다는 것은 심판의 절정을 의미합니다.
   사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인간을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이요,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인 것입니다.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는 환상의 주된 점(point)은 어린 양의 복음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데 어린 양의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 용서함을 전하기에 이 진리를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곱 나팔의 환상의 주된 점(point)은 고난 받는 교회입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세상이 교회를 미워하는 이유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똑 같다면 미워할 이유가 없지요.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이기에 갖가지 궤계를 사용하여 무너뜨리려 합니다. 이제 앞으로 살펴볼 일곱 대접 환상의 주된 점(point)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완전히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가 오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때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심판을 받을 그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데, 단지 복음을 믿었다는 것 밖에 없는데 무시무시한 심판을 받지 않고 주님과 영원히 산다고 하는 것을 몸소 체험할 때 찬송이 터져나올 것입니다. 마치 본문 3-4절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처럼 말입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 사이에(12장-14장) 사도 요한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는데, 두 가지 수확 즉 신자들의 알곡 수확과 불신자들의 포도 수확이었습니다. 아마 이 두 종류의 추수 사이에 마지막 일곱 번째 재앙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요한은 하늘의 크고 이상한 다른 사인을 봅니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라”(1절)고 하였습니다. 일곱 천사가 모두 하나씩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7절). 7절에 대접으로 번역된 단어는 일반적으로 얕은 대접입니다. 구약에서 주로 포도주를 마실 때 사용하던 잔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하였도다”(사 51:17)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1절에서 이 일곱 대접 재앙이 마지막 재앙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정 사정 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대접으로 확 붓는 심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런 무시무시한 심판을 내릴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죄를 너무 싫어하시고, 죄를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진리를 거부한 죄인들의 교만에 대하여 확실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올바로 안다면 그런 질문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신다면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지금에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일반은혜를 허락하셔서 햇빛과 공기와 비와 아름다운 자연을 맛보게 합니다. 그들에게 건강도 주시고, 생명도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러한 일반 은혜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다 마셔야 합니다. 전혀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자들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좋습니다. 너무 기쁩니다. 이전에 맛보지 못한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이전에 고생한 것이, 아팠던 것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구속하신 주님의 얼굴을 봅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영원합니다.

   이렇게 구원의 은혜와 진노의 심판이 갈라질 때 우리의 입에서는 감격의 찬송이 터져나올 것입니다. 그 모습을 요한이 내다봅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 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며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2-4절) 하였습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라 함은 맑은 수정같이 아주 투명한 바다인데 불이 섞어 있어서 죄인들은 결코 건널 수 없는 바다입니다. 그들이 건너다가는 불 심판을 받습니다. 죄가 하나님 앞에서 해결된 사람들 만이 건널 수 있습니다. ‘바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이름의 수(666)’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입니다(2절). 황제 숭배와 같은 사탄 마귀의 시험을 이긴 자들입니다. 주님을 거역하라는 핍박을 견딘 자들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좁은 길을 걸어간 자들입니다. 적당하게 믿지 않은 자들, 편하게 믿지 않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구원 받은 성도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죄에 대하여 민감한 것입니다. 주님처럼 죄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실수하여 범죄한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애통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진정한 회개의 열매를 맺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가 쉽게 넘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겸손히 주님을 더욱 의지하고, 다른 사람들도 겸손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자기 안에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한 참 성도들이 건너야 할 유리 바다입니다.
   그런데 유리 바다를 건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를 부릅니다(2절하). 바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입니다. 물론 출애굽기 15장을 간략히 요약한 찬송입니다. 본문에 가사만 있습니다만 아마 그 음악이 함께 했다면 그 감동은 온 세상을 뒤흔들만한 것입니다. 300여명의 찬양대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부르는 찬양처럼 그 감격은 말로다 표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번 주전 1500년경, 430년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자유를 누리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는 소망으로 살았던 모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하고 자유의 땅을 밟은 모세의 입에서 어찌 이런 노래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 고통의 북한 땅에서 아슬아슬하게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자유의 땅으로 넘어온 탈북자들이 감격의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런 노래와도 비교할 수 없는 찬송이 유리 바다를 건너는 자들에게서 터져 나옵니다.
   사실 오늘날도 우리가 큰 은혜를 받으면 찬송도 잘 부르지 못합니다. 부르면서 울고 또 부르면서 웁니다. 같은 찬송을 계속 반복해도 은혜가 넘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너무 크고 기이하기 때문입니다. 의롭고 참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속사람을 보시기에 오직 겸손한 자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자들, 이 세상에서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던 그런 사람들을 보십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 때 놀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구원 받은 자들이 너무 적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어서 요한은 하늘의 성소가 열리는 환상을 봅니다.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5-6절) 하였습니다. 여기 ‘증거 장막’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 세운 거룩한 장막을 가리킬 때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증거(Testimony)’란 언약궤 안에서 있는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한 시내산에서 가져온 십계명 돌판을 가리킵니다. 즉 요한은 마치 광야 시대 성막의 지성소 휘장이 열리는 듯한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거기서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오는데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했다는 것은 제사장의 복장입니다. 그런데 보통 제사장이 아니라 왕적인 권세를 가진 제사장입니다. 즉 일곱 천사가 심판의 제사장들입니다.
   이는 사실 오늘날 우리의 신분입니다. 영적인 제사장으로 주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권세가 있는 제사장입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을 축복하면 그 축복이 이루어집니다. 물론 전혀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사람 같으면 그 축복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용서하면 그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 같으면 우리에게 그 용서가 돌아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함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마 6:12)라고 기도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히 담긴 금대접 일곱을 일곱 천사에게 넘겨주고 나니(7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상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8절)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유리 바다를 건너간 후에는 일곱 천사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완성됩니다. 여기 ‘연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합니다. 그 영광이 너무 충만하여 아무도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마치 조금 전에 언급한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처음 성막(tabernacle)을 세웠을 때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히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히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4-35)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 찬란한 영광의 성전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히 12:29). 죄를 지닌 채로는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죄에 대한 무시무시한 심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이 세상 모든 사람은 훗날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을 맞이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느냐’ 입니다. 잠시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 마귀의 속한 나라 사람이냐,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입니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좁은 길을 가고 계십니까? 죄에 대하여 민감하여 그 모양이라도 버리려고 애쓰고 계십니까? 겸손히 매순간 주님만 의지하고 사십니까?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도 주님처럼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섬기려 하십니까? 신랑되신 주님의 재림을 손꼽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신부입니까?
   무시무시한 마지막 재앙을 볼 때에 정말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감격의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냥 부르는 찬송과는 질이 다른, 그 감동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임한 구원을 감격하며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만약 그런 감격의 노래를 부르기 힘들다면 유명한 George Mueller 의 권면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알고 나서 그 분을 사랑할 수 있나요? 만약 사랑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해달라고 간구해 보세요. 하나님의 온유하심, 친절하심을 찬양하면서 그 분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그 자녀들에게 좋은 일을 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인지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해 보세요. 우리의 깊은 영혼 속에서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는 더욱 쉽게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으며, 그 분의 모든 행하신 일에 대해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련이 다가올 때 좋으신 하나님께서 이 시련을 통해 내게 무슨 일을 하실지 기다려 보며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증거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손을 더욱 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247 수요설교 고난 중에 유혹을 이기려면 (벧전 1:13-21) 한태일 목사 2022-05-13 443
1246 주일설교 믿음의 어머니 (룻 1:6-18) 한태일 목사 2022-05-08 517
1245 주일설교 절망에서 소망으로 (눅 24:13-35) 한태일 목사 2022-05-01 541
1244 수요설교 구원의 큰 기쁨으로 (벧전 1:6-12) 한태일 목사 2022-04-28 467
1243 주일설교 선한 목자 요 10:1-5(한영제 선교사) 관리자 2022-04-27 494
1242 주일설교 부활 신앙 (눅 24:1-12) 한태일 목사 2022-04-17 512
1241 절기설교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4-49) 한태일 목사 2022-04-16 504
1240 주일설교 저희 뜻대로 넘겨주다 (눅 23:1-25) 한태일 목사 2022-04-10 576
1239 수요설교 산 소망으로 사는 나그네 (벧전 1:1-5) 한태일 목사 2022-04-07 481
1238 주일설교 너희 말과 같이 (눅 22:63-71) 한태일 목사 2022-04-03 484
1237 주일설교 어떤 실수를 하셨나요? (눅 22:54-62) 한태일 목사 2022-03-27 550
1236 수요설교 의인의 믿음의 기도 (약 5:13-20) 한태일 목사 2022-03-24 579
1235 주일설교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눅 22:47-53) 한태일 목사 2022-03-20 530
1234 주일설교 이 땅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눅 22:39-46) 한태일 목사 2022-03-13 560
1233 주일설교 실패하지만 결국은 ... (눅 22:31-38) 한태일 목사 2022-03-06 637
1232 수요설교 참고 인내하라 (약 5:7-12) 한태일 목사 2022-03-03 631
1234567891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