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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07-31 (월) 09:0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419    
우리에게 있는 위대한 대제사장(히 4:14-16)



만약 누군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사정을 잘 알아 낱낱이 하나님께 고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있습니다. 바로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중보자 제사장을 통하여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Day of Atonement)에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 법궤에 제물의 피를 뿌리며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레 16-17장).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마 27:51). 그리하여 이제는 우리가 제사장처럼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500년 전 로마 천주교가 타락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심한 핍박을 받던 개혁주의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진리의 깃발(flag)을 높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들어서 알만한 유명한 Luther, Calvin, Knox, Melanchthon, Huss, Tyndale, Zwingli, Wycliffe 등 개혁가들은 로마 천주교의 잘못된 가르침을 반박하며 ‘더 이상 희생제물은 필요 없다. 갈보리의 십자가로 충분하다. 더 이상 제사장은 필요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다. 더 이상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는 필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에 직접 나아가 고백한다’라고 주장하였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의 주된 가르침입니다.

히브리서 4장에서 주님 안에서 누리는 안식에 대하여, 앞으로 누릴 영원한 안식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데 믿음이 없어 말씀에 불순종하여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출애굽 1세대의 본을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11절).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복음을 순종하지 않으면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부정적인 경고였습니다. 또한 이미 믿어 안식을 누리는 우리에게는 말씀에 불순종하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마음의 생각과 뜻을 잘 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지속적으로 그 능력을 경험하라고 하였습니다(12-13절).
그리고는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아 주님을 붙들고 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14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큰, 위대한 대제사장입니다.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승천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DNA 를 가지신 분입니다. 즉 신성(Divinity)과 인성(Humainty)을 완전하게 소유하신 분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이름이 예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역사상 유일한, 가장 위대한 대제사장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도리를, 복음을 굳게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 믿음의 도를 붙잡으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믿는 도리를 굳게 잡는 일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 헌신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습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런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주님은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시련을 당할 때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간구를 하시는 분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어떻게 이 위대한 중보자의 직분을 가능하게 하는가? 그 해답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15절)고 하였습니다. 첫째로,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입니다. 여기 ‘체휼한다(sympathize)’는 말은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원어에 의하면 ‘같이 고통스러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연약함이란 인간이 가진 모든 실패, 실수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 부족함을 불쌍히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과 달리 우리의 연약함조차, 부족함조차 사랑하십니다. 예를 들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끌려왔을 때 율법을 따라 돌로 쳐죽이려는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다들 죄가 있기에 슬그머니 다 빠져 나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는 죄가 없으니 너를 돌로 치겠다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두려움과 수치심, 죄의식과 불안으로 떨고 있는 그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을,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처럼 시험을 받은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너무나 잘 압니다. 물론 우리가 당하는 모든 구체적인 시험을 똑같이 다 받으셨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33년 동안을 인간으로 사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배가 고파 굶주린 적도 있습니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습니다. 집안에서부터 핍박을 받으셨으며, 동족으로부터 멸시 천대를 받으셨었습니다. 믿었던 제자들에게 배신도 당하였습니다. 모함과 비방을, 억울한 누명도 쓰시고, 사람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지 않았다면 우리를 안다고 할 수 없겠지요. 마치 부자가 어떻게 가난한 자의 심정을 알며, 건강한 자가 어찌 병든 자의 심정을 알며, 배운 자가 못 배운 자의 심정을 알리오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처럼 인간이 되었었기에 우리를 너무 잘 압니다. 셋째로,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죄성이 없으신 분이라 우리와 달리 죄를 지을 수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시고 나서 사탄 마귀가 시험을 했어도, 굶주림 속에 먹을 것에 대한 시험도,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것에 대한 시험도, 이 세상 권력을 누리는 시험도 다 이기셨습니다(마 4:1-11).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 2:22)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죄를 지으셨다면 어떻게 온전한 희생제물로 우리의 죄를 속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구약의 제사장들처럼 그 자신도 죄를 속함 받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죄가 없으셨기에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온전한 구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게 사탄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힘을 주셔서 승리하게 도와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위대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음을 안다면 우리가 시험을 받거나 어려움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입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6절)고 하였습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 자주 나아가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경외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온 몸과 마음으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크신 자비와 긍휼을 입고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라고 하였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무슨 조건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기만 하면 값없이 베푸십니다. 아무 자격이 없지만, 안 도와주셔도 할 수 없지만 도와주십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갔던 수많은 사람들은 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키 작은 삭개오, 세리 마태, 일곱 귀신 들린 여자, 창녀, 문둥병자, 각종 병든 자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 등 모두가 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니 2000여년 역사상 절망의 늪에서 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은혜를 입었습니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귀신들에게서 풀려났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이든, 어떤 상황이든, 어떤 시련 속에서도 예수님께 나오면 위대한 대제사장으로서 긍휼을 베푸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하십니다. 우리를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시고 이 모습 이대로 받으시며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담대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두려움이 없이 자유롭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은혜를 갖고 계시며 도와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담대히 나아간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정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입니다. 진솔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다 고백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런 찬양이 생각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해
주 앞에 나와 무릎 꿇고
긍휼 베푸시는 주
하늘을 향해 두 손 들고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빗줄기
이 땅 가득 내리도록
마침내 주 오셔서 의의 빗줄기
우리 위해 부으시도록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아마 우리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 은혜와 보좌 앞에 나갈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다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아니 지금 당장 겪는 갖가지 어려움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헤쳐 나간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쩌시려고 그러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위대한 대제사장, 중보자 예수님이 있는데 왜 예수님을 붙들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오지 않는지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위대한 대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살아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부족함을 다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자비와 긍휼이 풍성한 분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처럼 온갖 시험을 당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분이기에 그 수많은 시험을 다 이기셨습니다. 사탄 마귀의 머리를 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예수님을 의지하고 때를 따라,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십시오.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 무엇이든지 고하시면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도와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개혁주의자들이 높이 들었던 깃발을 기억하십시오. ‘더 이상 희생제물은 필요 없다. 갈보리의 십자가로 충분하다. 더 이상 제사장은 필요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다. 더 이상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에 직접 나아간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들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그 능력을 경험하시면서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 가십시오. 예배 드리십시오. 찬양과 기도를 드리십시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꼭 은혜를 베푸실 줄 믿습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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