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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08-07 (월) 13:5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68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신 주(히 5:1-10)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하는 이야기는 ‘정말 완전히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일 것입니다. 사실 맞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서, 완전하지 않아서 100% 믿을 수 없지요. 고의적이 아니더라도 실수와 실패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내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요. 이런 이유들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은 종교를 만들어 비인격적인 신을 믿습니다. 허구, 허상을 믿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이런 신앙을 자기 최면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이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소통이 되는, 교제가 되는 하나님입니다. 바로 신구약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00% 완전히 믿어도 되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밀하게 간섭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정말 우리를 엄청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어떤 어려움, 슬픔, 고통을 다 아시고 동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언제나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4:16). 그러면 도와주십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이 낯선 유대인들을 만나면 처음 물어보는 것이 ‘당신의 대제사장은 누구입니까? 누가 당신의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립니까? 누가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입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성도들을 만나도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당신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지 않는데 어떻게 죄 사함을 받으며,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누가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는데 완전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고 계십니다’라고 답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위대한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이 히브리서 중심되는 주제입니다(5장-9장).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예수님이 구약의 대제사장과는 비교가 할 수 없는 탁월한 분으로서 온전한(Perfect) 대제사장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선 구약의 대제사장이 어떻게 그 직분을 감당했는지 설명합니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1-2절)고 하였습니다. 즉 대제사장은 사람을 대표하며, 하나님께서 사람 가운데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는 일은 사람을 대신해 하나님께 예물과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자신도 연약한 인간이었기에 무식하고 미혹에 빠져 죄 지은 자들을 용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그런 연약함에 싸여 있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이해는 하십니다. 인간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그것에 대해 민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의 대제사장은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먼저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3절)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첫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레 16:6)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주일에도 설명하였듯이 우리 예수님은 비록 인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속죄제는 드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의 몸을 친히 희생제물로 드리며 우리의 죄를 속하는 십자가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또 하나의 특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불러주셔서 감당하는 직분이기에 아주 소중합니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4절)고 하였습니다. 이 존귀한 직분은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한다고 임의로 제사장 직분을 취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경우가 성경에 있습니다(삼상 13:8-15; 대하 26:16-21). 아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출 28:1-4). 그의 아들들이 이어서 그 직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로는 레위 지파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지파는 땅을 유업으로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늘이 기업이 될 만큼 하나님이 친히 구별하여 부르신 제사장 지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러주셔서 일을 맡기시는 것처럼 존귀한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다,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요, 복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이 특권을, 이 복을 가볍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직분을 우습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주어진 직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목사가 준 직분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참 유감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훈련시키셔서 성령의 기름을 부으신 목사를 사용하여 직분을 주십니다. 혹은 초대 예루살렘교회처럼 교인들이 투표하여 피택이 된 후에 목사가 훈련시켜서 안수하여 직분을 주십니다. 받은 직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믿고 잘 감당한다면 훗날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제사장으로서 나 같이 부족한 사람을 부르셔서 직분을 주심에 감사하며 기쁘고 즐겁게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축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5절 이하에 구약의 대제사장과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우리 예수님을 비교, 대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도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5-6절) 하였습니다. 여기 예수라는 이름대신 그리스도를 사용한 이유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대제사장 직을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 직에 임명하신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이미 1장 5절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날 낳았도다”(시 2:7)라는 말씀을 인용하였듯이, 여기서도 이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으로서의 즉위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 반열(order)로서 대제사장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왕적인 제사장으로 사명을 받았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에 나오는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유명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왕에게서 제사장적인 섬김을 받았습니다. 즉 그는 그리스도처럼 왕이며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방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을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 14:18-20)고 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왕이며, 대제사장이기에 멜기세덱과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는 것이 왜 중요한지는 7장에 가면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은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7절)고 하였습니다. 인간이기도 하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하루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마 26:36-46; 막 14:32-42; 눅 22:40-46). 누가는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눅 22:44).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아야 한다는 고통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드셔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며 탄원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기에 응답해 주셔서 잘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통곡하며 기도해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께 탄원을 해 보신 적이 있나요? 밤을 지새우며, 잠못 이루며 간구해 보셨나요? 우리 예수님 그렇게 해 보셨기에 우리의 그러한 심정을 다 헤아리십니다.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기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근원이 되시고”(8-9절) 하였습니다. 아들이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엄청난 고난이라도 잘 감당하면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 직분을 온전하게 수행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순종하는 모든 자의 영원한 근원이 되었습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순종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함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10절).
우리가 받은 구원은 아무 대가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야 거저 받지만, 우리 주님의 통곡의 기도와 눈물과, 고난을 통하여 배운 순종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아무 노력 없이 선물로 주어졌다고 해서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굉장한 선물입니다. 소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주님에게 선물할 수 있을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 크신 은혜를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라도 갚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고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더라도 말입니다. 할 말 다하고, 기질대로 성질부리고 살면 절대로 성숙한 성도가 되기는 힘듭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고 하였습니다. 억울해도 말 없이 말씀에 순종함으로 온전함을 이루는 참된 성도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믿어도 됩니다. 실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인생을 통째로 맡기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찬양과 기도를 드리시면서 남은 인생을 헤쳐나가시기 바랍니다.
다만 우리 예수님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하는 것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하물며 우리들이겠습니까? 어떻게 고난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통곡의 기도, 눈물의 기도를 드려서라도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그 뜻대로 살 때에 고통스럽더라도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으니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하며 우리 형제, 자매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성도입니다. 영적으로 철이 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특해 하십니다. 기뻐하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하늘의 상급이 쌓이게 됩니다. 고난 후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며 참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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