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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09-25 (월) 06:4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24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복되도다(요 20:24-31)


신앙은 훈련입니다. 그리고 복습하는 것이 곧 훈련이지요. 지난 주 부흥사경회에서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은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그 연장 선상에서 복습과 아울러 요한복음의 결론 부분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째 날 저녁집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18)라는 제목으로 1) 우리는 증인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먼저 우리가 복음의 증인으로서 확실히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구약의 성막(장막)에 거하듯이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신다는 것이며, 곧 성령님이 거하심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말에는 능력이 없으나 하나님은 하신 말씀 그대로 실행하시는 분이어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3) 이렇게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심으로 우리는 내적으로 영적인 대립, 갈등이 있다고 하면서 회개가 쉬운 것이 아니다. 회개한다는 것이 은혜라고 했습니다.
   둘째 날 새벽집회에서는 ‘성령으로 난 사람’(요 3:1-16)이라는 제목으로 구약에서는 외형을 중요시 했으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는 내면이 훨씬 더 중요한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제2의 출애굽으로 새로운 출발, 새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셔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스스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둘째 날 저녁집회에서는 ‘배고픔에 대하여’(요 6:47-59)라는 제목으로 구약 광야시절의 만나와 같이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 영생을 얻으려면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여야 한다.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점점 더 나는 약해지고 보잘것없음을 인정하며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날 오전 예배에서는 ‘목마름에 대하여’(요 7:37-39)라는 제목으로 인생의 참된 만족은 심령이 복음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어쩌면 떡보다 물이 더 중요한데 광야시절 반석에서 물이 나온 것은 곧 반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생수가 나온 것을 예표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의지하여야 했듯이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이 바로 사람의 중심인 마음이 하나님의 보좌인 지성소가 되어 하나님이 왕으로, 주로 다스림을 받는 것이 곧 성령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날 마지막 집회에서는 ‘내 안에 거하라’(요 15:1-17)는 제목으로 우리는 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는 것을 깨달으면 어떤 두려움도 없어진다. 사실 날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을 체험하고 산다면 더 이상 큰 복은 없다고 했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듯이 비록 우리는 연약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라도 내 안에 주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면 성령의 열매는 맺힌다. 나는 부실한 가지이지만 주님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말씀으로 사랑의 설득을 당할 때 믿음으로 반응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비록 우리는 종이라고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종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친구로 여기며 인격적으로, 사랑의 대화로 설득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자,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도마가 등장합니다(24절). 아람어로 디두모(그 뜻이 쌍둥이)라고 불려졌다고 합니다. 아마 도마는 쌍둥이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사건 때문에 도마는 우리들에게는 의심이 많은 자로 낙인이 찍혀있지만, 사실 그는 아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도마에 관한 기록이 두 번 나타나는데, 한번은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서도 베다니로 가지 않으시니까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두려워서 안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이틀이 지난 다음에 가자고 하시니까, 다들 거기 가면 죽을 것이라고 하자,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고 할 정도로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처음 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왜 다른 제자들은 다 있는데, 도마만 빠졌는지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아서 모릅니다. 그의 성격상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신 후 비관하여 아무도 만나고 싶고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랬다고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그만 부활하신 주님을 못 만났습니다.
   여기서 하나 배울 수 있는 것은 공동체에 속하여 있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교인들을 시험에 빠지게 할 때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공동체를 떠나게 합니다. 모이는 자리에 가기 싫게 합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싫어하게 합니다. 형제, 자매들이 싫어집니다. 그럴 때에 마귀를 이겨야 합니다. 더욱 모임에,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도마에게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25절). 여기 25절에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주를 보았다고 ‘이르니’하는 원어의 동사는 미완료 시제입니다. 헬라어에서 미완료는 현재진행형을 말합니다. 즉 다른 제자들이 계속 도마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하지만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절하)고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가 분명히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데도 믿지를 못합니다. 아마 그들이 헛것을 보았고, 현실적이며 합리주의자인 자신의 이성으로는 못 믿는 것입니다. 즉 자신 손으로 확인하고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가까이 함께 있던 사람들이 다 보았다고 하는데도 믿지를 않으니까요.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의 참된 증언에 겸손히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가 지났습니다(26절). 8일째가 된 것입니다. 즉, 정확하게는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신 지 만 1주일이 지났습니다. 이미 유월절, 무교절이 다 지나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계속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도마가 자신들을 떠나지 않도록 붙들어 두었습니다. 26절에 “함께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 믿음이 침체된 형제, 자매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예배로, 모임으로, 공동체 안으로 다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들을 직접 만나셔서 격려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지 1주일 후에 다시 제자들이 모였는데 예수님께서 1주일 전과 똑같이 찾아오셨습니다. 문들이 닫혔는데도 그냥 통과하시고 나타나셔서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똑같이 인사를 하십니다. 그리고는 도마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뜻 밖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야! 너는 왜 그렇게 믿지를 못하느냐?’ 하면서, 도마를 책망하시면서 꾸중을 하실 것 같은데, 온유하신 주님께서는 사랑으로“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고 하셨습니다. 도마가 일주일 전에 다른 제자들에게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시며 그렇게 해보라고 하십니다. 마치 도마가 그런 말을 할 때에 옆에서 듣고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 알고 계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하시는 것을 듣고는 그만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손으로 직접 그 못 자국 난 손을 만질 필요도, 옆구리에 손을 넣을 필요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도마는 주님을 향하여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여호와)로,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믿음이 확실히 회복이 된 것입니다. 그 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후에 도마는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인도에까지 가서 선교를 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것이라 하더라도 확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눈이라는 것이, 손이라는 것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확실히 살아계십니다. 2000여 년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증거했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그렇게 목숨을 버리면서 증거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슨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7절하). 즉 그는 과거에 열정적인 믿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도, 다른 제자들의 증언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자기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확인한 후에야 믿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즉 도마는 증인들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에 부활의 믿음을 가지는데 실패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말씀을 믿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됩니다. 이 말씀이 진리라고 하는 증거가 많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먼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의 신앙고백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 도마의 믿음이 회복된 것은 부활의 주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복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고 믿는 저와 여러분들은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꾸 무엇을 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무슨 환상이나 기적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그 당시보다 완성된 계시의 말씀이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그저 마음으로 믿으십시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고백하십시오. 주님 사랑을 마음으로 품으십시오. 객관적인 성경 66권의 진리를 주관적으로,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복음서의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그가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였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0-31절)!
   요한은 가장 중요한 부활의 기적 외에 2장부터 12장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 기적들을 기록했는데, 이보다 훨씬 많은 기적들을 예수님께서 행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기적들이었습니다. 다만 자신이 복음서에 약 10개 정도의 기적들을 기록한 이유는 독자들이 이 증거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서라고 합니다. 주님의 기적들, 특히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의 말을 듣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양 속담에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는 것을 믿지, 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여지는 것을 믿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고 있음을 봅니다.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것이 눈에 보입니까? 양심이라는 것이 눈에 보입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사랑이 존재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양심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실을, 진실을 믿지 않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그러므로 나름대로 갖고 있는 소견을 버리고, 생각의 틀을 버리고, 고집을 버리십시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 사고방식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하고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고 강건해지는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을 내십시오. 믿음이 회복됩니다. 때로 의심이 생길 수도 있지만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나누게 됩니다. 사랑하게 됩니다.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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