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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10-30 (월) 22:1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465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롬 1:17)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개혁주의 신앙(Reformed Faith)이라는 말을 종종 들어보셨습니다. 이런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뿌리가 종교개혁에 있고, 그 개혁의 정신을 꾸준히 이어가고자 하는 개혁주의 교회(Reformed Church)에게는 오늘 주일이 의미 있는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500년 그리고 이틀 후,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을 대항하여 목숨을 내걸고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항의문(thesis of protesting)을 붙였습니다. 천주교의 잘못된 비성경적 교리를 95개 조항으로 지적함으로 무너졌던, 타락했던 기독교 신앙을 재건하자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불길이 멜랑톤, 쯔윙글리나 칼빈을 통하여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오늘날까지 개혁주의 신앙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 종교개혁의 동기가 로마 천주교 교황과 성직자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천주교회, 그 성직자들의 타락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직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래서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추기경에 오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루터 바로 전 세대의 교황 알렉산더 6세는 많은 첩을 두고, 4명의 사생아를 낳은 파렴치한 자였습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성직자 축첩 제도까지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사실 고아원의 태동은 그 때에 사제들과 수녀들 사이의 성범죄로 말미암아 생긴 사생아들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루터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의 취미는 도박이었다고 합니다. 귀족들과 추기경들을 모아놓고 밤새도록 돈을 걸고 카드 놀이를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교회에 천국열쇠를 주었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16:19)을 잘못 해석하여 그들 스스로 죽은 영혼들의 죄까지 사해 줄 수 있는 권위가 있다면서 면죄부를 팔아 많은 돈을 축적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한 청렴한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사보나롤라는 ‘네 자식을 몹쓸 놈으로 만들려면 로마 천주교의 성직자가 되게 하라’고 절규하였었습니다.
이렇게 교황이나 성직자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것은 종교개혁 당시의 시대 상황을 묘사하는 데는 정확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종교개혁의 동기로 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만약 그저 윤리적인 문제였다면, 루터나 칼빈은 결코 로마 천주교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천주교회에 남아 잘못된 윤리를 정화하며, 도덕적 청결한 삶을 위하여 투쟁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개혁주의자들이 막강한 권력의 로마 천주교와 결별하면서 순교의 각오로 개혁 운동을 가속화 시킨 것은 윤리, 도덕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잘못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윤리가 아니라 믿음의 내용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너무 중요합니다. 윤리나 도덕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합니다. 타락한 윤리나 도덕으로 인한 잘못된 행동은 몇 사람만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가르침은 수 세대에 걸쳐 수천만의 사람들을 죽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전통, 의식(ceremony)을 집어 넣었습니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의 공로를 집어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야 할 자리를 인간의 영광이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예수님처럼 행세합니다. 마리아를 무죄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숭배합니다. 사도들도 숭배합니다. 그들에게 기도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고치겠다고 일으킨 운동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루터는 당시 로마 천주교 사제(priest) 혹은 수도사(monk)이자 비텐베르그 대학 교수였었습니다. 루터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면죄부였습니다. 누구나 교황청에서 발행하는 면죄부를 사면 죄가 사해져서 천국으로 직행한다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되니까 부자들은 고해성사조차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천주교 수도사 테첼은 ‘금화가 면죄부 헌금함에 떨어지며 땡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설교했으니 말입니다. 당시 평신도들은 성경을 모르고 있었기에 그 말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 연옥의 개념은 없습니다. 낙원이나 음부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라틴어로 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평신도들은 라틴어를 몰랐으며, 그저 성직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곧 성경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런 너무 비성경적인 내용을 반박하여 내건 95개 조항도 거의 이 면죄부 교리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교황청의 면죄는 단순한 교회적인 처벌에 대해서만 사면하며, 교회는 교회가 부과한 것만 사면할 수 있다. 면죄부는 하나님이 내리는 형벌은 사면할 수 없다. 면죄부는 결코 죄책감을 제거할 수 없다. 교황이라도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이다. 면죄부는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 아무런 효력도 없다. 참으로 회개한 신자라면 면죄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은 것이며 면죄부는 필요치 않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참된 회개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95개 조항은 1440년대에 발명된 구텐베르그의 인쇄술로 말미암아 그 사본이 유럽 전역에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3년이 지난 1520년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파문 경고장을 보냈습니다. 6월 15일자로 ‘멧돼지 한 마리가 주님의 포도원을 짓밟고 다닌다’며 루터의 95개 조항 가운데 41개 조항의 오류를 지적하며 60일 안에 95개 조항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교서를 보냅니다. 그러나 루터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 교서를 태워버립니다. 그러자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고,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 소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황제와 제후들, 추기경들 앞에서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을 수 없다. 나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어떤 것도 취소할 수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교황청은 그를 죽이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루터는 계속 ‘만인 제사장론’과 같이 로마 천주교의 비성경적인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성직자가 옛날 제사장처럼 대신 죄를 사하고, 중보사역을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끝났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죄 용서함을 구하고,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 고해성사는 필요 없다. 만인이 제사장이다’(벧전 2:9) 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내걸기 102년 전, 1415년에 영국의 존 위클리프(1320-1384)와 체코의 얀 후스(1369-1415)의 화형식이 있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이미 죽은 지 31년이 지났는데 로마 교황청은 그의 시신을 파내고 그의 모든 저술을 태운 후 13년 후 그의 뼈를 불에 태웠습니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교수였는데 당시 유럽 전역에 흑사병으로 인하여 1348년부터 1350년까지 무려 2500만명에서 3500만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천주교회는 면죄부 판매와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신경 쓰는 것을 보고 그가 외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하게 살았고 세상 권력을 거절했다. 그런데 교황은 권력을 가지고 치부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교회의 머리이다. 교황은 적 그리스도다. 자신을 하나님 위에 올리려고 하는 죄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누구나 성경을 읽고 연구할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하며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 결과 교황청에서 파문을 당하였으나, 계속 성경을 가르치다가 쓰러져 죽었습니다.
후스는 당시 체코의 유명한 신학자요, 천주교 사제로 프라하 대학 신학교수와 총장까지 지냈습니다. 그도 ‘면죄부를 파는 교황은 가롯 유다와도 같다’라고 하며 교황청에 대항하여 천주교회 바깥으로 나아가 라틴어 대신 체코어로 설교를 했습니다. 자신들의 모국어로 성경의 메시지를 듣고 은혜를 받자 교인들은 환호했습니다. 후스도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자 교황청은 그를 종교재판에 소환하였습니다. 주위에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황제가 신변보호를 약속했으나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후스는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반석을 초대교황 베드로였다라고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해석이 틀렸다고 하면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신앙고백을 의미한다고(마 16:16) 함으로 정면으로 교황을 반박했습니다. 종교재판소에서 교황이 입장을 번복하면 파문을 면하고 살게 될 것이라고 회유했지만, ‘내 입장을 번복하면 하나님 앞에 죄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후스는 사형선고를 받고, 1415년 7월 16일 토요일 아침 사형장에서도 황제를 향해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불에 타 죽어갔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유명한 예언을 남겼습니다. ‘지금 너희는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후스라는 이름의 뜻은 체코어로 거위를 뜻합니다. 그가 예언한 대로 정말 100년 후에 백조가, 즉 루터가 나타나 시대가 거스를 수 없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어난 것입니다. 루터가 1520년 2월에 후스의 저술을 읽고서는 우리 종교개혁가들은 모두 ‘후스파’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100년 전부터 종교개혁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루터(1483-1546)는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방학을 마치고 친구와 학교로 돌아가다가 폭풍우 속에서 벼락을 만났습니다. 친구는 벼락을 맞고 죽었는데 그 때 살아난다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맹세한 후 살아나게 되자 아버지의 반대를 물리치고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죄책감이 심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는 고행을 하며 죄 사함을 체험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던 중 원죄로 인해 영원히 저주를 받은 죄인들에게 십계명의 율법으로 다시 압박하는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다고 고백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로마서를 읽다가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는 의를 통하여, 자기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의하여 구원이 주어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여기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그 죄에 대한 심판을, 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만나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데, 원래 죄인들이었으나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전가되어서, 의인이라 칭함을 받게 된 성도들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선한 일을 많이 하여도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임을 루터는 이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완전한 의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의인의 자격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불러주십니다. 하지만 죄성은 아직 남아 있기에 때로 혈기도 부리고, 거짓말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고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새 사람이 되었기에 불신자와 달리 완전히 다르게 살아가게 됩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살아가는 목적이 다르게 되었습니다.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우리가 삶의 주인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기에 철저하게 주님을 의지하고 살게 됩니다. 특히 사탄 마귀에 사로잡혀 사는 세상이 믿는 순간부터 우리를 미워하게 됩니다. 우리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의 미래를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구원을 얻은 것도 믿음이고, 믿은 후에도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리라"는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합 2:4)을 인용한 것입니다. 당시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로 알지를 못해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우선,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악이 극성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잊고 계시는 듯하여 하박국이 불평합니다(합 1:2-4). 그리고, 그 불평을 늘어놓았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더 악한 민족인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한다(합 1:5-11)고 하시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그래도 선민이 아니냐고 다시 하나님께 항변을 하였습니다(합 1:12-2:1).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응답하시기를, 의역을 하자면 "이제 너에게 무엇인가 보여주려고 하는데 다 받아 적어서 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여라. 나는 나의 의를 드러낼 것이다. 내가 결코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불의를 행하지는 않는다. 내 의가 들어날 때까지 의인인 너는 나를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상황을 고치기 위해서 네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는 내가 기록하라고 한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합 2:2-4) 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도,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1)에서도 인용을 하였고, 히브리서 저자도 인용하여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믿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믿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천주교 성직자들만 갖고 있던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돌려주기 위하여 자기 나라의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위클리프나 후스도 그랬는데 루터도 이 진리를 알려주기 위하여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드디어 평신도들이 직접 말씀을 읽고 공부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개혁주의자들이 되어 올바로 믿게 되었고, 그 결과 청교도들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살면서 날마다 자신의 삶을 개혁하면서 세상과는 다른 경건한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날마다 개혁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개혁가들이 외쳤던 다섯 가지 정신으로, 순교의 각오로 말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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