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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11-27 (월) 05:5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571    
양심의 개혁(히 9:1-14)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다음에 인간들은 양심이 더럽혀졌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 죄책감으로 힘들어 하다가 점점 무디어져서 거짓된 양심이나 악한 양심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최악의 경우는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딤전 4:2). 그 뜻은 양심을 다리미로 지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악한 영 혹은 귀신의 가르침에 빠져서 외식하며 거짓된 삶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양심의 가책,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피하려고 숨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인간의 양심은 점점 타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면 타락한 양심의 회복이,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양심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첫(옛) 언약으로는 이 양심의 개혁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에 대한 말씀입니다. 두 언약의 특징을 말하면서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은 외적인 것에 치중하였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내적인 것에 치중합니다. 사람의 외형보다는 속 사람의 변화, 양심의 개혁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히브리서 저자는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1절)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할 때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소, 즉 장막(tabernacle)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까지 자세히 나와있는 장막과 섬기는 예법을 2절부터 7절까지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이 장막과 섬기는 예법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히 8:5).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이 장막의 구조는 가로가 50m, 세로가 25m 입니다. 동쪽에 10m 넓이의 출입구가 있습니다. 장막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출입구를 통과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들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7절하, 9절)고 하셨습니다.
이 문을 통하여 장막에 들어가면 바깥뜰이 나옵니다. 거기엔 놋쇠로 만든 번제단과 손과 짐승의 내장을 씻는 물두멍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이 가져온 흠이 없는 짐승(양, 혹은 염소, 혹은 소, 혹은 비둘기)이라면 짐승을 묶은 후에 그 위에 손을 얹고 자신의 죄가 그 짐승에게 전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죽입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이 와서 짐승의 피를 받아서 단 사면에 뿌립니다. 그리고 각을 뜬 짐승의 몸과 머리, 기름 덩어리를 번제단 위에서 다 태웁니다. 바로 희생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그 짐승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번제단과 물두멍을 지나면 드디어 성소가 나옵니다. 성소는 15m x 5m 규모의 집입니다. 둘째 휘장, 즉 가운데 휘장으로 1/3의 지성소(The Holy of Holies)와 2/3의 성소(The Holy Place)로 나누게 됩니다.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는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2절)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소 안에는 정금으로 만들어진 등대가 남쪽을 향하고 있고 순수한 감람유를 사용하여 제사장이 등대를 켭니다. 어두운 성소를 밝혀주는 빛입니다. 항상 켜있어야 합니다. 바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요 1:9). 그리고 북쪽에 12개의 떡(진설병)을 놓는 상이 있습니다. 제사장 만이 먹을 수 있는 떡입니다. 12지파에게 공평하게 내린 만나 떡을 놓았던 것입니다. 이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요 6:35).
그 다음에는 둘째 휘장이 있습니다. 그 안이 바로 지성소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들어갑니다.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3-5절)고 하였습니다. 사실 분향단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마치 지성소에 있는 것처럼 표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를 강조하기 위함으로 여겨집니다. 제사장들이 향나무 혹은 고무나무를 빻아서 향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금향로 위에 놓고 불을 피웁니다. 그러면 향의 연기가 나기 시작하면서 성소 안에 연기가 퍼집니다. 그러면 성소 안에 좋은 향내가 가득하게 됩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바친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그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금으로 싼 언약궤(The Ark of Covenant) 혹은 법궤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 하나님이 거하는 곳에는 말씀과 기도가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세 가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입니다. 생명의 떡,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둘째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이것은 제사, 예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셋째는, 언약의 비석들, 즉 십계명의 돌판입니다.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다고 합니다(5절). 언약궤를 덮는 두껑이 속죄소(Mercy Seat)입니다. 대제사장이 여기에 피를 뿌림으로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가 일시적으로 사하여지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속죄소를 덮는 천사들의 모양을 한 영광의 그룹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죄의 비밀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낱낱이 다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Day of Atonement) 밖에 못 들어간다고 했습니다(레 16장). 모세를 통하여 그 백성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율법대로 살지 못하기에 대제사장을 통하여 그들이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통틀어서 속죄를 해야 했습니다. 헌데 대제사장이 먼저 자기 죄를 속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가정의 죄를 속죄하고, 모든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하고, 대속죄일에만 입는 대제사장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세마포로 된 흰옷으로 내의로부터 통으로 짠 고의입니다. 그 위에 에봇을 입습니다. 거기엔 청색, 자색, 홍색의 술이 달려 있습니다. 또 방울이 달려 있어서 대제사장이 걸어갈 때 딸랑딸랑 소리가 나도록 합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죄가 있으면 지성소에 들어가서 즉사해 버리기 때문에 방울 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은 줄 알고 끄집어 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6-7절)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예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 백성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율법을 못 지켜도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그림자였습니다.

문제는 이 옛 언약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에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8-10절)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이 장막으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 성소 혹은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그 때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장막은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속 사역의 비유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예물로 제사를 드리고 섬긴다고 해서 양심이 깨끗하게 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식은 육체의 예법, 외적인 예법만 되어 개혁이 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고 합니다.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것이었기에 새 언약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양심의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11-14절)라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이 땅의 장막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섬기시는 장막은 하늘에 있습니다(히 8:1-2). 영적인 사역입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였습니다. 짐승의 피가 아닌 우리 예수님의 피로 단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입니다. 이 놀라운 새 언약의 말씀, 복음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구원이 임합니다. 이는 일시적으로 육체가 정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속 사람이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보혈이 능력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합니다. 양심이 회복이 됩니다. 양심이 개혁이 됩니다. 양심이 참 자유를 누립니다. 더 이상 죄의식으로, 죄책감으로 고통 받지 않습니다. 사죄의 확신을 갖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깨끗한 양심의 소유자입니까?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아니면 우리를 정죄하려는 악한 영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지은 죄 때문에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진정으로 회심하셨고,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로 인한 모든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라고 하였습니다.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마음에 뿌림을 받았으며, 성령의 세례를 받았으니 양심을 개혁하여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교회에게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깨끗한 양심으로, 참 마음으로,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마음을 품고 하는 것 아닙니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 하는 것 아닙니다. 속죄의 은혜 때문에, 양심을 회복하게 된 은혜 때문에 즐겁고 기쁘게 섬기는 것입니다. 그 감격 때문에 자원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나 같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그 크신 은혜를 베푸셨기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집사의 자격을 이야기하면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딤전3:9)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겉 사람보다 속 사람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합니다. 양심을 깨끗하게 회복해야 합니다. 양심의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이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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