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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12-04 (월) 22:4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426    
피흘림이 없으면(히 9:15-22)


원죄의 전가로 말미암아 죄인으로 태어나는 인간은 죄를 가진 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어야 구원을 받으며,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데 말입니다.
여태까지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맺으신 옛 언약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시고, 성소 즉 장막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주셨으나 그 백성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장막을 지으라 하시고 거기서 제사를 드림으로 제사장들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불완전하고 일시적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히, 영원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의 완성이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 믿는 우리가 구속을 받아 죄 사함을 얻으며, 깨끗한 양심이 회복이 되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흘리신 십자가 보혈의 공로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 보혈의 효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5절)고 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하셨다. 중보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셔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화해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롬 8:15).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십니다. 사람들 누구나 부끄러운 죄가 있습니다. 입으로 말하기조차, 기도하기조차 없을 정도의 죄 말입니다. 또한 실수들과 실패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형제들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난 허물과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십자가의 보혈이 그런 모든 죄를 씻어줄 수 있으며, 모든 상처를 다 치유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셨는데 그 기업을 얻을 근거가 바로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즉 우리 앞날에 소망을 주셔서 오늘을 힘있게 살게 하십니다. 죽음 이 후 영원한 세상에 대한 소망까지도 말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난이, 슬픔이 힘들지 않습니다. 견디게 합니다. 미래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16-17절)고 하였습니다. 즉 십자가의 보혈이 새 언약의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유언(will)’이라는 단어는 ‘언약(covenant or testament)’이라는 단어와 똑 같습니다. 상식적인 말이 아닙니까? 유언장을 남겨도 유언한 사람이 죽지 않으면 그 유언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유언장이 효력이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새 언약으로 약속을 했어도 실제 중보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기 전까지는 새 언약의 말씀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정확한 때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님은 실제로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새 언약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사실 첫 언약도 피로 세운 언약이었다고 합니다(18절). 비록 짐승의 피이지만 말입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19-21절)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고 한 말씀을 기억하고 말한 것입니다. 피를 번제단에 뿌리거나,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는 것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정결하게 되는 이 상징적인 피 뿌림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22절)고 한 것입니다. 율법의 예식 가운데 정결케 되기 위하여 물과 불(민 31:22-24) 혹은 고운 가루(레 5:11-13)를 사용한 적이 있지만, 피 뿌림은 늘 지켜야 할 규례였습니다. 그 때 피 흘림은 짐승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며, 죄 사함을 위하여 피 흘림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짐승이 죽어야 할 만큼 죄는 하나님에게 끔찍한 반역입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롬 3:23).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아니고는 죄 사함은 실제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죽음, 십자가에서의 피 흘림입니다. 사실 구약의 성도들의 구원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십자가 사건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0-12)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고 죽었다면 그들의 구원은 외상, 신용대출(on credit)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죄까지 온전히 지신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었다면 미완성인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말하자면 그들은 오직 다가올 구원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하면서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니 약속을 받지 못하였나니”(히 11:39)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이 있는 자일까요? 죄 용서함을 받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인간은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죽음만 있을 뿐입니다(롬 6:23상). 영원한 사망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죄 용서함을 받으려면 피 흘림이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죄의 대가를 피로 치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보혈의 능력이 죄를 사하여 줍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덮어주십니다. 치워주십니다. 멀리 옮겨 버립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말입니다(시 103:12). 하나님께서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렘 31:34).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고 하였고,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진리가 다른 종교에는 없는 우리 기독교(Christianity)에만 있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에게 못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과거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선물로 아들을 보내시고 처참하게 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받은 것이면 은혜가 아니지요.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데 엄청난 선물을 주셨기에 은혜라고 합니다.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만왕의 왕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에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Philip Yancey 의 책 ‘What So Amazing about Grace?’ 에 의하면 영어로 Grace 를 사용하는 경우가 Grateful(감사), Gracious(정중하게), Say Grace(식사기도), Your Grace(폐하), Act of Grace(사면령), 혹은 Grace Period(유예기간) 등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은혜는 바로 죄 용서함의 은혜인 것입니다. 다른 은혜와는 비교가 안됩니다. 우리는 이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 용서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이 은혜를 받은 자라면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일에도 불평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을 기꺼이 용서해야 합니다.
한번은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주님 대답하십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고 말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용서입니다. 은혜를 베푼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형제, 자매 사이에도, 성도들 사이에도, 이웃들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이이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아니 나 자신도 죄와 허물이 많건만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함을 입었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없기에 다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토리 키 재기 입니다. 별 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역하는 죄인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시는 방법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그 보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과거의 모든 죄도 용서 받았습니다. 현재 짓는 죄도 용서하십니다. 미래의 지을 죄까지 다 용서하십니다.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입니다. 그 은혜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 얻겠네 샘 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한없이 있도다
날 정케하신 피 보니 그 사랑 한없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기억 속에 늘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보혈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는 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받은 은혜에 보답하며 살 수 있습니다. 누구나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됩니다. 늘 이 은혜 안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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